국가민족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솔도미
2011. 9. 13. 21:46
◆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가장 아끼던 문화재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를 자신이 세운 호암미술관에서 감상하는 호암.
이달 12일은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다. 호암은 한일병합이 되던 해에 태어나 헐벗고 굶주린 국민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사업부터 시작했다. 그 후 50여 년간 제조업, 금융업, 미디어 등 다양한 업종에 걸쳐 사업을 전개했다. 지금은 글로벌 IT업계 넘버원이 된 삼성전자 발전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한국식 자본주의 선각자인 셈이다. 비서팀장과 일본지사장 등으로 오랜 기간 지근거리에서 호암을 보좌한 정준명 전 삼성재팬 사장(65)을 지난 3일 찾아가 `인간 이병철`에 대해 들어봤다.
◆ 규칙적이고 철저한 생활
◆ 규칙적이고 철저한 생활

= "정군(君), 많이 기다렸재. 내가 늦잠을 자버렸다." 82년 어느 날 호암은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당시 정준명 비서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평일 오전 8시 57분이면 어김없이 사무실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장실이 있는 층에 내리면 9시 정각을 알리는 괘종이 울릴 정도로 철저했던 호암이 딱 한 번 9시를 넘겨 출근한 것이다. 9시 5분도 안 된 시간이었지만 호암은 스스로 지각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촌분을 아끼며 활동했다. 아침식사는 토스트와 달걀, 커피로 했으며 점심식사 때는 주로 한식이나 일식을 택했다. 저녁은 자택에서 보통 가정집과 비슷한 한식을 즐겼다.
호암은 호사스러움이나 낭비를 멀리했다. 책상에 놓인 뽑아 쓰는 화장지는 두 겹 중 1장만을 떼어서 썼다.
◆ 일 욕심 많아
=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해라.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히 보는 사람이 있다."
호암은 일 욕심이 많았고 자신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새로운 흐름이나 신제품, 신기술에 매우 민감해 국외 삼성지사에서 보내오는 새 책이나 기술동향 자료 등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임직원들에게도 기대 수준이 높았고 많은 걸 요구했다. 특히 눈여겨 본 사람이나 키울 재목이라고 생각되는 인재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대하고 많은 일을 줬다.
◆ TV 3대 동시 시청
= 자택 거실에는 똑같은 TV가 3대 놓여 있었다. 3대를 통해 당시 같은 시간에 방송되던 KBSㆍMBCㆍTBC(동양방송) 뉴스를 동시에 시청했다. 그날 벌어진 일에 대해 어느 방송사가 공정하게 전달했는지를 비교하면서 본 것이다. 저녁뉴스가 끝나면 잠자리에 들었다. 당시 기술로는 시간이 갈수록 TV 화질이 달라질 수 있었다. 호암은 이걸 놓치지 않을 정도로 꼼꼼했기 때문에 당시 삼성전자에서는 이 TV 3대 색상을 주기적으로 점검했다.
호암의 뛰어난 관찰력을 보여준 일화가 또 있다. 일본에 들르는 호암은 종종 대형 서점이나 백화점을 둘러봤다. 종전에 갔던 백화점에 상품 진열방법이 달라졌거나 매장 내부 배치를 조금 바꿔도 이를 금방 알아차렸다.
◆ 은혜는 반드시 보답
= "Mr. Lee(이병철 회장님), 한국인이 은혜를 기억해준 데 대해 맥아더 장군을 대신해 깊이 감사드립니다."맥아더 장군 부인은 1982년 4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한국음식점 우래옥에서 호암을 만나자 반갑게 인사했다.
호암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맥아더 장군 묘소가 있는 버지니아주 노포크시 맥아더기념관을 찾아가 헌화하고 제일제당 인천공장과 용인 호암미술관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과 크기가 똑같은 동상을 기증했다. 호암은 맥아더 장군을 한반도 공산화를 막은 구국의 은인으로 여겼다.
◆ 각별한 문화재 사랑
= "언제 이걸 다 가져오노?"
호암은 종종 외국으로 나간 귀중한 우리 민족문화재를 회수하지 못한 한탄을 토로했다. 그만큼 외국으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 회수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호암은 민족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서화, 자기, 붓글씨, 금속품 등을 40여 년에 걸쳐 국내외에서 수집해 호암미술관에 기증했다.
◆ 사람 보는 기준은 신언서판(身言書判)
= 평생 논어를 생활교본으로 삼았던 만큼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다. 용모와 언행, 태도, 안정감, 균형감을 중시했다. 신입사원 공채 때는 면접을 끝내고 문을 나가는 지원자 뒷모습까지 유심히 관찰했다. 지원서 학력란은 아예 접어 놓도록 해 출신 학교가 주는 편견을 배제하려고 했다.
호암은 패션감각이 뛰어났다. 옷을 입을 때는 상의와 하의, 와이셔츠, 넥타이 색상 조화까지 꼼꼼히 따졌다.
◆ 경청하는 습관
= 호암은 평소 말수가 적고 생각을 많이 했으며 다른 사람 말을 경청했다. 통찰력과 선견력이 뛰어났다. 말이 명확하게 이해될 때까지 거듭해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필요할 때는 임직원들에게 숙제를 내고 이에 대한 피드백도 반드시 해줬다.
■ 정준명 사장은…
호암은 호사스러움이나 낭비를 멀리했다. 책상에 놓인 뽑아 쓰는 화장지는 두 겹 중 1장만을 떼어서 썼다.
◆ 일 욕심 많아
=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해라.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히 보는 사람이 있다."
호암은 일 욕심이 많았고 자신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꼈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새로운 흐름이나 신제품, 신기술에 매우 민감해 국외 삼성지사에서 보내오는 새 책이나 기술동향 자료 등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임직원들에게도 기대 수준이 높았고 많은 걸 요구했다. 특히 눈여겨 본 사람이나 키울 재목이라고 생각되는 인재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대하고 많은 일을 줬다.
◆ TV 3대 동시 시청
= 자택 거실에는 똑같은 TV가 3대 놓여 있었다. 3대를 통해 당시 같은 시간에 방송되던 KBSㆍMBCㆍTBC(동양방송) 뉴스를 동시에 시청했다. 그날 벌어진 일에 대해 어느 방송사가 공정하게 전달했는지를 비교하면서 본 것이다. 저녁뉴스가 끝나면 잠자리에 들었다. 당시 기술로는 시간이 갈수록 TV 화질이 달라질 수 있었다. 호암은 이걸 놓치지 않을 정도로 꼼꼼했기 때문에 당시 삼성전자에서는 이 TV 3대 색상을 주기적으로 점검했다.
호암의 뛰어난 관찰력을 보여준 일화가 또 있다. 일본에 들르는 호암은 종종 대형 서점이나 백화점을 둘러봤다. 종전에 갔던 백화점에 상품 진열방법이 달라졌거나 매장 내부 배치를 조금 바꿔도 이를 금방 알아차렸다.
◆ 은혜는 반드시 보답
= "Mr. Lee(이병철 회장님), 한국인이 은혜를 기억해준 데 대해 맥아더 장군을 대신해 깊이 감사드립니다."맥아더 장군 부인은 1982년 4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한국음식점 우래옥에서 호암을 만나자 반갑게 인사했다.
호암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맥아더 장군 묘소가 있는 버지니아주 노포크시 맥아더기념관을 찾아가 헌화하고 제일제당 인천공장과 용인 호암미술관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과 크기가 똑같은 동상을 기증했다. 호암은 맥아더 장군을 한반도 공산화를 막은 구국의 은인으로 여겼다.
◆ 각별한 문화재 사랑
= "언제 이걸 다 가져오노?"
호암은 종종 외국으로 나간 귀중한 우리 민족문화재를 회수하지 못한 한탄을 토로했다. 그만큼 외국으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 회수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호암은 민족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서화, 자기, 붓글씨, 금속품 등을 40여 년에 걸쳐 국내외에서 수집해 호암미술관에 기증했다.
◆ 사람 보는 기준은 신언서판(身言書判)
= 평생 논어를 생활교본으로 삼았던 만큼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다. 용모와 언행, 태도, 안정감, 균형감을 중시했다. 신입사원 공채 때는 면접을 끝내고 문을 나가는 지원자 뒷모습까지 유심히 관찰했다. 지원서 학력란은 아예 접어 놓도록 해 출신 학교가 주는 편견을 배제하려고 했다.
호암은 패션감각이 뛰어났다. 옷을 입을 때는 상의와 하의, 와이셔츠, 넥타이 색상 조화까지 꼼꼼히 따졌다.
◆ 경청하는 습관
= 호암은 평소 말수가 적고 생각을 많이 했으며 다른 사람 말을 경청했다. 통찰력과 선견력이 뛰어났다. 말이 명확하게 이해될 때까지 거듭해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필요할 때는 임직원들에게 숙제를 내고 이에 대한 피드백도 반드시 해줬다.
■ 정준명 사장은…

경희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에 입사했다. 74년 사원 신분으로 도쿄지점으로 발령받아 일본으로 건너간 뒤 81년 삼성 회장비서실 비서팀장으로 발탁될 때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89~92년 삼성전자재팬 대표이사를 거친 후 92~93년 비서팀장, 98~2004년 삼성재팬 사장을 지냈다. 지금은 법무회사 리인터내셔널 상임고문으로 재직 중이다.
[김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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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2년 삼성전자재팬 대표이사를 거친 후 92~93년 비서팀장, 98~2004년 삼성재팬 사장을 지냈다. 지금은 법무회사 리인터내셔널 상임고문으로 재직 중이다.
[김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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