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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성 진 (金星振)
(1916~1996)
호 녹성(綠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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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金星振) –우리 시대의 만파식적(萬波息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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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은 1916년 12월 30일 서울 종로구 묘동에서 안동 김씨인 김익룡과 김해 김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세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많은 이왕직아악부 입소생들이 그렇듯 그도 빈곤한 생활로 인해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상태였다. 편모 슬하에서 교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시 관비(官費) 15원과 교과서 피복대까지 지급한다는 스승의 권유에 따라 아악부 양성소 제4기생으로 입소했다. 동기로는 김기수(대금), 김준현(피리), 이창규(가야금), 홍원기(가야금) 등이 있다. 그는 여기서 당대 최고의 대금명인 김계선, 아악수장인 유의석, 제1기생인 박창균, 제2기생인 김천룡(인간문화재 김천흥의 친형)의 훈도를 받았다. 원래 김성진은 그때까지만 해도 정작 꿈 많은 문학소년이었다. 밤하늘을 우러러 별을 보기를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그는 시·동화·동시를 쓰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었다고 한다. 그가 쓴 동화가 매일신문의 작품모집에 1등으로 당선돼, 10원의 상금을 타기도 했다. 그의 아호는 녹성(錄星), 문학소년이었던 어린 시적부터 수많은 밤하늘의 별들 중에서 밝고 빛나는 별보다는 그 옆에서 희미하게 초록빛을 내던 별이 좋아 스스로 녹성이라고 이름 짓게 된 것이라 한다. 그는 그 이름처럼 늘 겸손의 뜻을 품어 평생을 함께 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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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직아악부에 들어 온 김성진은 학과에서는 그리 출중하지 않았지만 대금 실기를 비롯한 악과에서는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실제 그는 아악부 입소 이래 한시도 떼어 놓지 않았던 대금을 부지런히 연마했다. 김성진은 생전에 이 시절을 되돌아보며 ‘남들이 한 시간 할 때면 나는 두 시간씩 연습을 하면서 노력하던 시절’이라고 회고한다. 1936년 3월 그는 졸업과 동시에 아악부 아악수로 임명되었고 이것이 평생을 대금과 함께 한 그의 필생의 업(業)의 첫 출발이 된 셈이다. 그는 1941년 25세때 중매로 만난 조갑순과 결혼하게 되며 이후부터 김성진의 대금은 일반인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김성진의 대금을 바르게 알기위해서는 그의 스승인 김계선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다. 1891년 3월 3일에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궁중의 겸내취(兼內吹)를 지낸 분의 권유로 치룬 악수(樂手) 견습생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내취(內吹)의 길을 걷게 된다. ‘내취’라는 것은 군대의 취악대를 말한다. 그는 1906년 12월 주전원(主殿院)의 내취로 임명된 후 1908년 7월 장례원(掌禮院)의 내취로 옮겼다가 1911년 2월 이왕직아악부의 세악내취(細樂內吹)로 일하다가 1913년 아악수로 임명된 후 이왕직아악부에서 아악생들을 지도하는 중에 1943년 타계한 인물이다. 김계선이 내취가 되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대금을 배우기 전에 중금을 연마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그는 내취로서 중금을 학습한 후에 당시 궁내부 장악원(掌樂院)에 소속돼 있던 최학봉(1851~?)의 개인교습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는 최학봉에게서 배운 실력을 바탕으로 이왕직아악부에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워낙 실력이 출중하였다. 그는 근대 궁정음악인 가운데 가장 이름을 날린 인물로 “김계선 이전에 김계선 없고, 김계선 이후에 김계선 없다.”라는 말을 남긴 명금(名芩)이었다. 그는 당시 방송이나 공연을 통해서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이런 구한말 불세출의 명금은 1943년 여름에 타계를 하게 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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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김성진의 대금 정악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스승인 김계선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김계선의 대금독주가 장안의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가 타계한 이후 김성진이 계승해서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해방 후 이왕직아악부에서 구왕궁 아악부로 바뀌었을 때도 이 곳을 지켰고 또한 1951년 부산에서 개원한 국립국악원에서도 예술사(국악사)가 되었으며 악사장과 부원장직 등을 맡으면서 평생을 국립국악원을 지킨 분이었다. 아울러서 1955년 4얼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중고등학교)가 개소된 후 대금전공자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거의 30년에 걸쳐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국립국악원과 국악사양성소에서 그는 이왕직아악부의 선배와 동기들과 함께 근무하였는데 김성진의 대인관계와 처신 또한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나 성품에 관해서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이상용(단국대교수)의 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작은 체구이지만 깨끗하신 외모와 당당하신 풍체로 우리들에게 자신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이주환 원장선생님, 엄격하고 원칙에만 통할 듯이 늘 차분하신 말씀으로 타이르시는 성경린 악사장선생님, 당당하신 풍채와 우렁차신 음성으로 우리들의 미래의 사표 되시던 김기수 장악과장선생님, 상사와 아랫사람들의 중간에서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얼굴을 붉히시며 미안해 하시던 녹성 김성진 선생님 …(중략)… 선생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다정다감하시어 속이 상하셔도 크게 내색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도록 지도하시었으며 언제나 ‘예끼’란 말 한 마디면 모두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는 연주가로서도 교육자로서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가 40대 중반이었던 1960년, 이 무렵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인 존 리비는 국립국악원에서 그의 대금소리를 들었는데, 그는 자신의 비망록에서 “김성진의 대금소리에서 평온을 얻었노라”라고 기록하였다고 한다. 존 리비 컬렉션 중에는 대금 거문고 병주가 수록돼 있다. 김성진은 1964년 12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의 대금보유자로 지정되었고 1968년 12월 2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대금정악의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는 평생토록 산조를 불지 않고 정악만으로 일관했다. 정악분야에서 유일하게 단일악기가 무형문화재 지정종목이 된 것은 ‘대금정악’이 처음이며 그 첫 보유자가 김성진이었다(피리정악이 1998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대금정악이란 대금으로 연주하는 정악으로 풀이할 수 있다. 정악은 본디 합주음악이므로 본래 대금독주의 정악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악을 대금으로 독주를 하면 나름대로 특유의 멋과 색다른 흥취가 있게 된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 강점기 김계선 등에 의해서 구축되고 바로 김성진에 의해서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금정악의 대표곡으로는 <평조회상>과 <청성자진한잎>을 들 수 있다. <유초신지곡>으로도 불리는 평조회상은 그 상령산의 가락을 자유스럽게 풀어서 연주하는 것으로 은은한 가락과 청아한 음색이 일품이다. 아울러 <청성자진한잎>은 흔히 <청성곡>이라고도 불리며, 대금이나 단소로 연주하게 된다. 가곡의 계면조 이수대엽(二數大葉)을 변주한 <태평가>를 장2도 높여서 옥타브 위로 올린 후 관악기의 특징적인 음색 및 주법에 맞게 연주하거나 복잡한 장식음을 첨가하거나 부분적으로는 어떤 음들의 길이를 연장하여 변주시킨 곡이 바로 <청성곡>이다. 김성진은 이 곡을 스승인 김계선에게서 배워 더욱 발전시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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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범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생활의 규칙이 있었는데 절대 집에 와서는 자신이 대금을 불거나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았고 가족들 앞에서 대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원서동에서 살았는데 그가 집에 대금을 가져오거나 레슨을 하는 일 등은 평생동안 거의 없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또한 국악과 관련된 인사나 기자 등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예술과 생활을 엄격하게 구분해 온 이러한 습관은 평생토록 이어졌다. 또한 그는 신문 등의 인터뷰 등에 대해서도 한사코 거절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의 예술세계에 관해 대금이 아님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 싶다. 1960년 10월 9일 삼고초려(三顧草廬)하다시피 해 그를 만났던 당시 문화재 전문위원 예용해의 글을 일부 옮겨와 본다.
'이날 김씨를 만날 때까지 국악원으로 그를 찾기 수삼차, 끝내 만나주려 들지 않았다. “선배분도 많고 내가 이룬 것도 없고 한데 무슨 신문에 날 것인가”하며 피한다. 초려에 삼고했던 삼국지적인 우화의 편말을 줍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토록 겸손한 ‘우화의 주인공’도 한번 대금을 잡으면 의연 누구의 추종도 불허한다니 유쾌한 일이다.’
1984년 4월의 어느날 월간지 <음악동아>의 취재차 만난 소설가 유익서도 모두 그와의 만남이 무척 힘들었음을 기록해 놓고 있다. 유익서는 이 때 만난 김성진을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삶과 대금을 이해하는데 좋은 단서를 제공하기에 다소 긴 글이나 여기에 다시 인용해 본다.
'언젠가 산행에서 나는 뒤로 몸을 잔뜩 휘인 채 바람을 견디고 있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본 일이 있었다. 선 자리가 불행히 바람막이가 전혀 없는 툭 튀어나온 가파른 절벽 위인지라 바람을 견디지 못해 그 몸이 뒤로 휘었을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사뭇 경이로운 기분으로 나는 그때 목숨, 인내, 환경 이런 것들을 생각했었고 그리고 환경에 적응키 위해 몸까지 휘어 온 그 소나무의 인고의 세월을 헤아리며 숙연해지기도 했었다. 대금정악의 명인 김성진, 목련과 진달래 벚꽃을 피우다 돌아와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4월의 햇빛을 밟으며 그의 뒤를 따라 국립국악원의 복도를 걷던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옛날의 그 소나무를 연상했다. 성문 지붕의 망새처럼 위로 약간 솟구쳐 올라간 왼쪽 어깨와 그와 대조적으로 오랜 풍상을 겪어온 누각의 처마처럼 사뭇 비스듬히 기울어져 내려간 오른쪽 어깨, 그리고 약간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의 뒷모습이 예의 그 소나무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모습은 고희를 앞둔 자연적인 나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금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면 취구(吹口)를 올려 놓는 왼쪽 어깨는 응당 위로 치켜 올라가게 마련이고 그리고 뻗어 지공(指孔)을 쥐는 오른쪽 팔은 으레 아래로 약간 쳐지기 마련 아니던가, 김성진 씨의 뒷모습은 바로 그 연주할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이 소나무를 휘이게 하듯 젓대가 그렇듯 몸을 휘이게 만들었구나 하는 깨달음은 내게 한 가닥 심오하고 교훈적인 경건함을 느끼게 했다.’
노대가 김성진에게는 ‘딸기코’라는 애칭이 있다. 빨갛고 큼지막한 코가 짐작을 하게 하듯이 그의 약주와의 인연은 매우 깊은 듯 하다. 그에게는 술과 관련된 몇 개의 일화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1945년, 정종 두어병에 대취하여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70년 묵은 명기(名器)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종종 이 일을 애석해 되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애주가인 그에게도 수칙이 있어서 특별한 연주를 앞둔 며칠 동안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담배를 피우되 양쪽 끝으로 피워 가운데 입술을 보호했다고 한다. 담배를 계속 가운데 입술에 물고 피우게 되면 대금을 접했을 때의 감각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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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은 평소 대금의 소리를 가을의 소리로 비유했다. 먼 들에 아지랑이 아른아른 피어오를 때 호젓이 앉아 한 곡조 뽑으면 더없이 좋은 소리가 피리소리요, 비오는 처마 밑에 뚝뚝 떨어지는 낙수 소리를 듣는 정취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거문고 소리가 여름의 소리라면 대금은 가을의 소리라는 것이다. 그는 달밝은 가을 하늘 기러기떼가 지나가며 내는 그 청량하고 쓸쓸한 울음소리가 바로 대금소리 같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의 대금정악이 점차 무르익어감에 따라 말년에 무대에 앉아 젓대에 입술을 축이고 대금을 부는 모습이 마치 ‘청산의 품에 안긴 학의 모습’같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때의 대금소리는 더 이상 대나무 소리도 아니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소리도 아니었다고도 얘기한다. 그것은 자연 그 자체의 소리였으며, 이것이야말로 정악에서의 득음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금세기 <청성곡>의 최고의 명인으로, 녹성 김성진을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김성진은 1995년 2월 1일 강서구 방화1동 217-132호 자택에서 향년 80세로 별세했다. 그가 타계한 이후, 그의 삶과 예술을 다룬 특집 프로그램을 구성·진행한 음악평론가 송혜진은 1995년 2월 5일 서초동 국립국악원 앞마당에서 거행된 중요무형문화재 제20호 예능보유자였던 김성진 명인의 영결식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오로지 대금정악의 세계에 몰입하여 한국 예술의 드높은 이상을 한층 더 올려 놓은 외길 인생을 추모하는 자리였습니다. 판소리 명창처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분이 아니어서인지 언론에서의 뜨거운 취재경쟁은 없었지만 자연인으로서 성취한 김성진 선생님의 성숙한 인격과 예술가로서 보여 온 그이의 진실한 삶을 아는 많은 분들이 동참하여 김성진 명인과 함께 마감한 대금 명인의 시대를 애도하였습니다. 그를 보내는 영결식 맞은 편, 국립국악원 소극장(우면당) 유리문에는 공교롭게도 김성진의 대금연주 모습이 담긴 올 한해 토요 상설국악공연의 포스터가 나붙어 있어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이런 저런 생각을 들게 했을 것입니다.’
대금을 통한 철저한 장인정신을 구현했던 김성진은 자신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원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저 대금과 함께 소박한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살았던 그의 기질은 매우 섬세하면서도 다감하였다. 이것은 가정적으로나 제자들에게 보여 온 모습을 통해서는 물론이요, 작은 생명까지도 아끼는 품성에서 그러함을 느낄 수 있다. 평생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려고 한 인물임과 동시에 세상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려고도 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또한 마음이 여려서 어쩌다 제자들에게 매질을 하면 돌아서서 늘 울었다고 국악사 양성소 시절의 제자들은 회고한다. 또한 그는 모든 생명을 중시하던 마음가짐을 가졌기에 훗날에는 화초 등을 가꾸면서 식물들의 성장을 보는 일이나 곤충들의 생태계를 관찰하는 일을 더없이 즐거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도 명상을 즐겼다고 하는데 명상의 주제는 대개 자연과 나 그리고 또 자신을 있게 해 준 사회라고 하며 이런 명상의 뒷끝은 늘 씁쓸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돌봐준 사람들이 많은데 자신이 이른 경지가 너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이러한 일화 등을 통해서 그가 매우 욕심없고 소박한 삶을 살았지만, 대금과 관련해서는 매우 지향하는 세계가 높았고 늘 부족한 자신을 내심 질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소설가 유익서에게 남긴 말도 이런 그의 심정을 잘 읽게 해준다. “예술에 무슨 끝이나 한계가 있겠습니까. 예술의 나이로 따지면 나는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셈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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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성이 평생 가장 소중하게 여긴 대금이 있다. 이 악기가 김성진의 손에 들어오게 된 사연은 좀 길다. <음악동아> 1984년 6월호에 기록된 사실을 옮겨보자면 그가 이 대금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40년대 초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어느 낯 모를 50대 노인에게 그가 <평조회상>의 악보를 만들어 주고 대가로 받은 쌍골죽을 소재로 이왕직아악부 3기생인 김보남 선배가 대금을 만들어 2기생인 선배에게 선물했던 것을 나중에 자신이 25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인수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는 푸른 빛으로 청청했었을 대(竹)도 겉은 그의 손길에 젖고 속은 그의 입김에 절어서 검붉은 호박색으로 변했다. 김성진의 이 대금을 매우 아껴서 여러 차례 ‘수리’를 해서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대금은 변했지만 더욱 더 그의 대금소리는 고아함을 더해 갔고 그의 대금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맑게 해주었다고 여겨진다.
녹성은 평생 국립국악원에서의 활동 외, 정농악회(正農樂會)를 통해서도 큰 역할을 했다. 정농악회는 1976년말 창립되었으며 그 동기는 대학 국악과 교수 몇 사람이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노악사들과 함께 정악공부를 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이 때 모인 젊은 대학교수는 김정자, 김선한, 서한범, 양연섭 등이며 김천흥, 봉해룡, 이석재, 김태섭과 함께 김성진이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원로 악사로 함께 참여하였다. 정농악회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1977년 5월 24일 <중광지곡>의 전곡 연주회를 통해 관심을 끌기 시작했으며, 이후 계속해서 순수한 정악연주와 함께 전곡연주를 지향하였다. 이렇듯 정농악회의 창립회원 가운데 이왕직아악부 출신의 봉해룡, 이석재, 김태섭, 김성진 등은 모두 타계했으며, 현재 유일하게 김천흥 만이 생존해 계신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성래(국립국악원)는 이 시절의 김성진을 이렇게 회고한다.
'70년대 중반에 원로 악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종악회에서의 연주활동은 완숙기에 접어든 그의 음악세계를 세상에 드러내는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중략) 티 한점 없는 맑은 입김으로 강유를 겸비하여 내는 소리와 박자를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가택과 농음은 그야말로 50년을 농축시킨 세월의 결정체였으며 명인다운 면모를 과시하는 무대였다. 그래서 일부 언론에서는 '입신의 경지’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이가 김성진에게 정악대금을 사사했다. 그가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에서 길러낸 제자 가운데서 제1기부터 제10기까지의 제자들 가운데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의 이름을 들어보면 김중섭, 조창훈, 조재선, 이상용, 김호성, 이상규, 박용호, 김응서, 김정수, 이동복, 장명화, 홍도후, 홍종진, 황규일, 조성래, 최삼법 등을 거명할 수 있다. 이외에도 국립국악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등을 비롯한 많은 대학 또한 풍류회 등 국악동호인회의 제자 등을 가리키면 그의 제자는 실로 헤아리기 힘든 숫자가 될 것이다. 그의 국악사 양성소 제1기 제자였던 조창훈이 쓴, 김성진 선생의 영결식의 고별사 중의 일부를 통해 그의 대금이 진정 이 시대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해 본다.
'청아하고 그윽한 대금 소리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인의 소리얼을 지녀 오신 녹성 김성진 선생님.(중략) 선생님의 대금소리는 새벽바람처럼 맑고 고요하였습니다. 선생의 대금소리는 위로 받고 싶은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주셨고 지치고 흔들리는 이들에게는 대나무처럼 꿋꿋한 의로움을 주었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에게는 평온을, 욕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청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생의 대금소리는 우리시대의 만파식적(萬波息笛)이었습니다. (중략) 선생께서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심에 의연한 자세로 대금을 치켜잡고 고고히 연주하시던 그 모습은 고매한 예술정신의 상징으로 이제 남은 이들의 가슴에 새롭게 새겨질 것이며 평화와 자유의 상징, 그 소리는 이 땅에 만파식적의 소리로 남아 영원할 것입니다.’
윤중강(음악평론가)
<자료제공 대한민국 예술원(http://www.naa.go.kr)> | | |
출처 : 대금소리 지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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