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음악

[스크랩] 죽농 김계선

솔도미 2006. 8. 10. 11:11

김 계 선 (金桂善)

(1891~1944)

호 죽농(竹濃)


죽농(竹濃) 김계선 선생은 그가 살아있을 당대에도 그러했지만, 그가 가고 없는 오늘날에도 그가 남긴 수많은 레코드와 일화(逸話)들, 그리고 그의 연주를 극찬한 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과연 그가 일세를 젓대 하나로 풍미한 불세출의 명인임을 실감케 한다.


1915년 만들어진 장악원의 악원 이력서에는 그의 이력이 이렇게 적혀 있다. 본관은 경주요, 본적이 경기도 양주군 노원 하계 2통 5호, 출생은 경성 중부 정선방 동구내(현재 종묘부근)로 되어 있다. 1906년 15세의 나이로 주전원(主殿院) 내취(內吹)로 임명되었고, 1908년에는 장악원 내취 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1910년 한. 일 합방과 함께 장악원이 해체된 이듬해 2월 1일 이왕직 아악부가 개설되면서 세악(細樂) 내취로 재임용 되었으며, 1913년 8월 1일로 악수(樂手)로 승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조(王朝) 시대의 예인이나 장인들이 그러했듯이, 장악원 시절까지만 해도 악생(樂生)이나, 악공(樂工)으로 불렀던 악수(樂手)들은 천민출신에서 세습되었었다. 그래서 특이한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은, 바로 세습제로 음악의 가문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김계선 선생의 위치가 당시 아악부내에서 어디 있었는지 그 당시의 조직을 잠깐 살펴보자. 위로는 아악사장(雅樂師長) 1명, 아악사(雅樂師) 2명, 아악수장(雅樂手長) 8명이 있고, 그 아래에 아악수(雅樂手)가 10~20여명 되었었다. 그리고 악생(樂生:학생)들의 실기 교육은 악수장 이상이 되어야만 교육시킬 자격이 있었다. 같은 아악부 안에서도 악사(樂師)나 전악(典樂)등의 직급은 비교적 지체가 높은 집안의 자제들로서, 현악을 배운 사람들에 의해 세습되었다.

1919년 악수가 크게 모자라 공모제가 채택되면서 신분의 차별은 점차 사라져 갔지만, 악수 출신들은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현악기를 다룰 수 없었고, 나팔이나 피리, 젓대같은 관악기를 배워야만 했다. 또는 직제상 가장 낮은 서열인 악수들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그 분야의 교육자가 될 수 없었고 연주자로 일생을 마쳐야 했다. 아악부내에서 김계선은 바로 이런 악수 출신이었으며, 악수가 되기 전의 직책이 서울의 어느 영문(營門:지금의 사대문)에 속해있던 취악대(吹樂隊:지금의 군악대) 출신이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해서 대금과 인연을 맺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젓대의 명인이 되었는지를 1941년 「조광(朝光)」이란 잡지 4월호에 그가 직접 쓴 「나와 대금」이란 글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나는 명치 24년(1891) 구력으로 3월 3일 김덕화(金德花)의 장남으로 한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부친의 대(代)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던 가세가,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후 하여는 매우 영락(零落)하여 한미(寒微)하기 짝이 없는 경황이었습니다.

당시의 유소(幼少)들이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서당에 천자문을 끼고 드나들었으나, 빈핍(貧乏)하기 마련 없는 집안의 경제는 그거나마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리다고는 하여도 하는 소업(所業)없이 빈둥빈둥 집안에 틀어박혀 장난이나 치고 노는 것이 안되었던지, 이웃에 사는 부친의 친지가 있었는데, 그 때 겸내취(兼內吹)에 출사(出仕)하던 한(韓) 모라는 어른이 마침 영문(營門)에서 악수 견습을 80명이나 모집하니 이 기회에 한번 응시하여 봄이 어떠냐고 종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철없는 자기야 별다른 생각을 가져볼 나이도 아니기야 하였지만, 그렇게 큰 기대도 없는 대신, 무어 그리 싫은 마음도 없는 것이나, 집안에서도 군색한 살림에 보탬이라도 있을까 해서, 그 한가지 바램에 14세 소년은 내취도가대청(內吹都家大廳)에 적은 머리를 조아린 것입니다. 까다로운 고시가 있는 것도 아니요, 응모자가 과다한 것도 아니라서, 내영(內營) 겸내취(兼內吹)에는 쉽사리 뽑힐 수가 있었습니다.


잠깐 내취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면, 서울안 육영문(六營門)에는 다 각기 그에 부속한 취악대(吹樂隊)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치 오늘의 군대와 흡사한 것입니다. 그러던 여섯 영문의 내취들이, 모두 다 영문 폐쇄와 함께 해산되고, 그 수효도 무척 줄어들어 수십의 악수가 근근 내영(內營)에 부속하여 그 내영 겸내취만이 잔존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영 겸내취도가는 지금의 종로 일정목(一丁目) 각전(角田) 양복점(洋服店) 뒤 예전 상사동(相思洞)에 있었습니다. 그때 자기가 수업해야 할 악기가 대금으로, 선생에게서 지시되어 지금까지 40년이나 이르게 된 것입니다.


대금이 신라 삼죽의 하나로 중금, 소금이 또한 존재한 것은 아시는 일이지만, 대금을 전공한다 하여도 첫날부터 대금에 착수함이 아니요, 그보다 척장(斥長)도 약간 짧고 지공(指孔) 사이도 매우 가까운 중금을 얼마동안 능숙한 뒤에 비로소 배우는 것인데, 자기도 처음은 중금을 익혔습니다.


이와 전후하여 나는 궁내부 장악원(宮內府 掌樂院)에 출사하시던 당대 대금으로는 비견(比肩)할 이 없는 최고봉, 최학봉 선생에게 개인 교수를 받는 편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이에게 있어 어진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 같이 즐겁고, 행복한 일이 없는 것인데, 사계(斯界)의 출발에서부터 이렇듯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진실로 감사로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내영(內營)의 겸내취(兼內吹)까지도 폐문(閉門)의 비경(悲境)에 이르러, 입소한지 2년만에 파(罷)해 버렸는데 자기와 몇몇만이 운 좋게 장악원에 취직하게 된 것은 이 또한 보이지 않는 힘의 가호라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명치 39년 11월, 음악에 종사하려면 누구나 우러러보는 궁내부 장악원에 자기도 함께 어깨를 겨누고 드나들게 되던 때에, 스므살도 못된 16세 소년의 득의(得意)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즐거운 것입니다.


더욱 존경하는 스승 최학봉(崔鶴鳳) 선생 문하에서 일의(一意) 일관대금(一管大 )을 연찬(硏鑽)하게 되는 행복을 갖게 된 것은 어떻게 큰 기쁨이었겠습니까. 질시, 반목, 파벌도 있고 해서 최학봉 선생의 평판은 그의 대금의 기(技)와는 매우 거리가 있었으나, 제자들을 대하는 선생은 어디까지나 엄격하시고 친절하신 존경할 어른 이셨습니다. 문하에는 나 이외에도 여럿이 선생의 교수를 입었지만, 그 중에서도 자기는 누구보다도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그에 따라 동료의 미움도 면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도 선생의 편애(偏愛)라기보다, 쉬지 않고 하려고 노력하는 나의 근기(根氣)있는 열성을 조금 보아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도 자만심(自慢心)을 갖지 않았습니다.


은사 최학봉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에게 있어 모두 생생한 기억이요, 거의 육친(肉親)의 정(情)까지 푸근한 것이나, 다른 날로 미루고 악기 「대금」에 대해서 해설을 조금 하여보려고 합니다. 편집하는 이의 청이기도 하여 물리치지 못하고 써보는 것이나, 악기 대금의 이야기는 나보다는 몇 배 고명하신 선생이 많을 터인데 기실, 한낮 하잘 것 없는 그것의 연주자에 불과 하는 자기에게 맡기시는 진의(眞意)는 자믓 불가해(不可解)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로 기록하여 보면 대금은 신라 신문왕(神文王)때의 창작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신문왕은 신라 제31대 왕이신 데, 재위 11년인가, 12년인가 하셨습니다. 그런데 대금을 신문왕대의 제작이라고 하는 것은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전한다는 아래의 전설에서 오는 것입니다.


바로 신문왕 때에 동해(東海) 한 가운데 홀연히 소산(小山)이 생기(生起)하였는데, 형상은 구두(龜頭):거북이 머리 모양)와 유사하더랍니다. 그 후에 한 간죽이 났는데, 낮에는 나뉘어 둘이 되고 밤에 합하여 하나가 되는 고로, 황이 기이(奇異)하다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르게 하여, 그것으로 적(笛)을 만들어 이름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설이 비록 있으나 괴기(怪奇)하여 가히 취(取)하기 어렵다는 것을 신라고기(新羅古記) 스스로가 부언(府言)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대금을, 위의 허황하다 할 괴담(怪談)에 의하여 신문왕 때에 창작된 것이라고 전하는 것은, 한쪽으로 생각하여 덜 부합되는 것이나, 더 확실한 증거도 모자라는 이쯤으로 우선 그런 대로 만족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의 학구적으로는 매우 천박한 견해일 뿐이요, 이런 문제는 달리 동양음악사의 권위에게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대금을 필두(筆頭)로 하는 삼죽(三竹)이 신라에서 기원하여 고려, 이조, 현대, 이렇게 오늘까지 전래한 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역력한 사실이겠습니다. 한림별곡(翰林別曲)인가 하는 가사에, 관현(管鉉) 자지러진 음악의 도취경을 그린 대목에 최종구(句)를 "一枝紅의 빗근 笛吹, 過夜景 긔 어떠하니 있고" 하였습니다.

고려조에서도 대금이 어떻게 중요한 악기 이였다는 것을 잘 설명하여 주는 것으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조에서도 제7대 세조 대왕이 가야금과 아울러 대금을 선취(善吹)하였다는 것은 너무도 대금의 진가를 빛내는 것입니다.


나의 스승 최학봉 선생의 일적수(一敵手)로 명금 정약대 선생이 계셨는데, 정선생은 그 제일보부터 다른 사람과 상이(相異)하여 매일 인왕산(仁旺山)에 등산하여 대금을 취주(吹奏)하기 무릇 10년에 대성한 비범(非凡)한 어른이셨습니다. 흔히 대금에 선수(善手)되는 별다른 비전(秘傳)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도 그 선취(善吹)하는 묘체(妙諦)의 지시를 바라는 분이 없지도 않은데, 나는 그럴 때마다 많이 부는 도리 이외에 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평(世評)에 따르면 자기도 무척 천품(天稟)에 득(得)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도, 내게 음악적 특성이 남달리 지녔다는 것은 풀어낼 수 없습니다. 내세운다면, 누가 묻더라도 가볍게 순순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소리치고 자랑이라도 할 것이 있다면, 남의 곱(倍), 아니 몇 10배 더 많이 대금을 불었다고 하는 것뿐입니다. 그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꿈에라도 내가 남에게 뛰어날 타고난 특별한 자질이 있었다고는 마음도 먹어보지 않았습니다.


"난 재분(才分:재주)이 없으니까" "음악은 예술이니까 그런 소질이 있어야지"라고 눈물나는 정진(精進)도 없이 체념해 버리고, 범속(凡俗)한 경계에 주저앉아 타협하여 버리는 젊은 악인들의 무척 마음 편한 태도에 접하게 되면, 시세(時勢)이니까 어찌하는 수 없지, 하다가도 매우 안타깝습니다. 음악에 대성하는 조건으로 생활의 여유를 울부짖고, 그래야 비로소 그 길에 감연(敢然)히 매진할 수가 있을 듯이 강개(慷慨)하는 후진(後進)도 있습니다.


자부하는 것은 아니나, 내가 여기까지 걸어온 길은, 오늘의 우리 후배가 걷는 길 수백 배의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살림의 궁핍은 쳐들지 말고라도 그 멸시, 냉대, 오욕(汚辱)의 환경에서 우우(優遇)라고는 말할 수 없더라도, 제법 안정한 자기의 현금(現今) 위치에 상도(想倒)할 때는 참는 것만이 귀한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은 것같이 느끼는 것은 제법 느긋한 심경의 하나입니다.


관악은 40이 명수(命數)이니 50이 그러닐 하고, 대금도 40, 50이면 볼 일 다 본듯이 근심하고 걱정하는 분이 있으나,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먹기에 있지 않은가 하고 싶습니다. 그야 체질과 먼저 논의한 후가 아니면 가볍게 단정하기가 어려우나, 나의 신조(信條)는 불 수 있을 때까지는 대금 불기를 놓지 않으리라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가볍다고 할 수 없는 지병의 신경통이 늘 걱정이나 얼마간은 매우 건강합니다.』


김계선의 -나와 대금-

(1941년 「朝光」4월호에서)


이 글은 과거의 예인(藝人)들, 특히 천한 신분 출신의 악사들이 일평생 음악 활동에 종사하면서도 악보라든가 신변잡기(身邊雜記) 같은 글을 전혀 남기지 못했는데 반해, 당대 최고의 명성을 날린 명인이 그의 50세 때 자필로 쓴 일종의 회고록이기 때문에 음악사학적인 사료(史料)로서 그 가치가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이 글의 내용을 간단히 간추려 보면, 가가 14세 때에 이웃 친지의 소개로 내영(內營) 겸내취(兼內吹)로 뽑히어 당대의 명인 최학봉 선생의 문하로 들어가 선생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그로 인해 동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고도 조금도 자만심을 갖지 않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남들이 어떻게 해서 대금을 그렇게 잘 불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자기로서는 남의 몇십 배, 몇백 배 많이 부는 도리밖에 없다"고 잘라 대답하고는, "난 타고난 재주가 없으니까" "예술은 소질이 있어야지"라고 눈물나는 노력도 없이 체념해 버리는 젊은이들을 볼 때는 아무리 시류(時流)가 그렇다 하더라도 매우 안타깝다는 심경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자기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가난과 멸시, 냉대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참는 것만이 귀한 것으로 깨달았다니, 실로 놀랍기까지 하다. 그리고 관악(대금이나 피리)은 40이니 50이니 하고 스스로들 자기의 연주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는데, 그는 불 수 있을 때까지 대금을 놓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그는 과연 비범(非凡)한 인물이요,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 받아 부족함이 없는 듯 하다. 그는 항상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며 부단히 노력하여, 근세 100년을 통틀어 대금의 우뚝 솟은 금자탑(金字塔)을 쌓았으니,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명성을 날렸지만 이제 그가 가고 없는 오늘날에도 세인(世人)들의 입에서 「김계선 이전에 김계선이 없고, 김계선 이후에 김계선 없다」라는 극찬은 그의 뛰어난 실력도 물론이려니와 그의 겸허한 자세와 성품을 두고 한 말 같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그는 신분이 낮은 아악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는 위치에는 못 올라갔어도 소리로서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음률이 오늘날 대금의 대 사부이신 김성진 선생의 소리로 그 맥(脈)이 직접 이어지고 있으니, 아직도 그의 유음(遺音)과 가락이 오늘날까지 살아서 움직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선생의 실력이 아악부 안팎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초부터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가 아악부를 사직하던 1939년까지 20년 가까이 아악부의 김간판(金看板)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정상을 누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악의 제례악(祭禮樂)과 연례악(宴禮樂)은 원래 합주곡이지 독주라고는 없었으며, 산조 같은 민속악은 개발도 되지 않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악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에, 어쩌다가 아악부에 귀한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그들을 위해서 아악 감상시간을 갖곤 하였다. 그때 그의 독주는 거의 빠지지 않고 끼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그가 개발해서 정착시킨 것으로 알려진 그 유명한 대금 독주곡 상령산과 청성 자진한잎이 바로 그것이다. 이 곡은 오늘날에도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목으로, 한 훌륭한 예인(藝人)에 의해서 창시되었다는 사실과, 연주가로 인해 새로운 곡이 삽입되었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악도(樂道)가 엄격한 궁중 음악기관에서 파격(破格)적인 것이었다. 그것도 아악수의 신분인 그에게 독주를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실력이 독보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선생은 아악과 속악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연주 생황를 했던 특이한 인물이었다.


1920년대 서울에는 조선권번(朝鮮券番)이라는 기생 조합이 있었는데 권번에서는 어린 기생들에게 가야금, 양금등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고, 또 그들의 요청 출입을 지휘하며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중간 역할을 하였다. 권번마다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권번의 기생들은 정악(正樂)에 능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것은 당대 전통 가곡(歌曲)의 명인이었던 하규일(河圭一:1867~1937)이 그 권번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하규일은 이왕직 아악부의 촉탁으로 학생들에게 가곡, 가사, 시조를 가르쳤다. 김계선이 조선 권번에 나가 기생들의 가무(歌舞) 반주를 하게된 것도 하규일의 요청 때문이었으며 아악부 악수(樂手)의 권번 출입이란 그에게만 허용된 예외적인 조치였다. 김계선의 젓대를 높이 평가했던 하규일이 아악부에 강력하게 청을 넣었기 때문에, 아악부도 특별히 이를 묵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번의 기생들도 가곡이나 시조를 부를 때 그의 반주 없이는 노래를 못하겠다고 성화가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무튼, 그의 권번 출입은 약간의 생활의 여유도 가져왔지만, 그가 민속악과 만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 당시 도입되기 시작한 플룻이나 오보에, 클라리넷, 섹스폰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여 마음대로 소리내고 아무 곡조나 불어 넘기는 뛰어난 재주도 보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와 같이 그는 양악기를 다루어 본 솜씨로 거기에서 얻은 취법(吹法)을 대금에도 응용하여, 신 민요나 유행가를 반주할 때는 플루트의 취법(吹法)을 도입함으로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던 것이다.


그가 만년에 가지고 다니던 분절식(分折式:대금이 짤라져 두 토막이 됨) 대금은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다. 어느 때인가 한국 사람과 일본인들이 뒤섞인 어느 모임에 초청을 받고 연주를 하게 되었다. 그가 참석한 술좌석에서 어느 경망스러운 일본인 한 사람이 그의 대금을 함부로 굴리며, 경멸하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보이자, 천성이 유(柔)한 그도 끝내 분함을 참지 못해, 다시는 대금을 불지 않겠노라고 화를 내면서, 그 자리에서 일본인을 대금으로 내리 쳤다고 한다. 이 통에 그가 분신처럼 아끼던 대금이 두동강이가 나고 말았다.

이에 깜짝 놀란 일본인은 이 대금이 천(千)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는 귀중한 악기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깊이 사죄하고 보상비로 거금(巨金) 200원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 당시 200원은 적지 않은 돈이었는데 10원을 주고 수리를 하고 나니 190원이 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에 그가 지니고 다니던 대금은 반절식(半折式)이 되었었다.


김성진 선생은 항상 그가 분절식 대금을 흰 천으로 된 악기집 속에 넣어, 뒤 쪽 허리춤에 차고 다니시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일제시대에 누구보다도 일본을 자주 왕래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진가를 알게된 일본인들이 종종 창과 국악기 연주의 명인들을 초청했고, 비타.OK.콜롬비아 등 당시 일본의 유명한 레코드 제작회사들은 이들의 연주를 다투어 취입했었다. 선생은 아악뿐만 아니라 일반 유행가의 반주에까지도 탁월했기 때문에, 기생들과 일행이 되어 일본 왕래가 특히 잦았다. 그때 그가 취입했던 수많은 레코드가 지금도 여러장 전해오고 있다.


그가 일본 동경에서 레코드를 취입할 때의 일이다. 야마다 고오사쿠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추어 대금을 불게 되었는데, 야마다는 그에게 "어디 당신이 먼저 불어보시오"라고 청했으나,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무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그대들이나 실컷 연습하시오"라고 한마디 던진 다음, 눈을 지긋이 감고 그들이 연습하고 있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본격적인 연주로 들어갈 때, 추호의 착오도 없이 훌륭한 연주로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 그러자 야마다(山田)가 크게 놀라는 표정으로 "내 일찍이 센다이(仙臺) 지방의 한 여자가 무슨 음악이든지 한 번 들은 것이면 곧바로 사미센(三味線)으로 옮겨 타는 뛰어난 연주를 보여준 귀재(鬼才)를 만난 적이 있는데, 내 평생에 그대 같은 천재를 만나기는 이번이 두 번째요"라고 그의 완벽한 연주 솜씨에 경탄해 마지않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또 그에 대한 이런 이야기도 전해온다. 인간문화재 김천흥 선생은 1930년 창덕궁에서 아악부 정기 연주회가 열렸을 때, 일본 여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와서 이 연주회를 관람했는데, 김계선의 독주가 계속되는 동안 모두 손수건을 꺼내들고 눈시울을 닦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그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그 소리에서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인 들의 설움이 가득했던 소리로 들었던 모양이다.


국악계의 원로인 성경린 선생은 아악부 시절에 그의 대금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평조회상(平調會相)은 주로 저음으로 취주(吹奏)되는 비절한 가락이었다.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퉁소의 그것인 양 끊길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고, 그러면서 원망하듯 사모하듯 우는 듯 호소하여 여음이 요요하단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청성 자진한잎의 독주는, 그 높은 음으로만 드러내는 천마(天馬) 하늘을 달리는 듯한 자유스럽고 신비스러운 가락인데, 그 취주의 모습이 또한 장관이었다. 막막 높은 음을 대금 특유의 청공을 드러낼 때면, 젓대를 든 어깨쭉지가 날짐승의 그것처럼 모양스레 출렁이었다. 그런 점에서 명저 김계선은 젓대를 한갓 입으로 부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마음을 기울여 불어대는 진정한 명인이라고 말할 것이다."라고 그의 뛰어난 예술성에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1939년 그가 그나마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직을 사직한 까닭은,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으나 세평(世平)에 의하면, 그가 권번(券番) 출입으로 인하여 속악(俗樂)과 너무 가깝게 지낸다는 이유로 상당한 배척과 반발이 매우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것은 그가 천민(賤民) 출신의 악수(樂手)로서 20년 가까이 종횡무진으로 활약하고 그의 이름이 방송과 레코드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고 명예를 얻게 되자, 그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의협심이 강하고 정도 많았던 그는 동료들의 차가운 눈총 속에서도 오랫동안 악수직을 버텨냈지만,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사직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시기상으로 그의 아악부 악수직 사직은 그에게 엄청난 시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수탈이 가혹해졌고, 흥청거리던 권번도 시들해지면서 그의 주 수입원이던 권번의 사례비도 중단되고 만 것이다.


조혼(早婚)한 아내와 4남매를 두었던 그는, 모든 수입원이 끊어진 상태에서 당장 하루 두끼의 호구(糊口)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관철동에 있었던 집을 팔아 신설동으로 이사하여 셋방살이에 들었으나 생활이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에게 "너는 저것을 먹으면 죽는다"라고 말했다면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을 하던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 국악계 원로는 그 때를 회상하고 있다.


그는 1944년 53세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며, 사람들은 그가 굶어 죽었을 것이고 아마도 화장했을 거라고 전해지고 있다. 만년에 그의 가까운 벗이 찾아가서 말못할 그의 형편을 위로하고자 하면, 그는 담담한 어조로 "악인(樂人)은 음악으로 만인(萬人)을 즐겁게 할 뿐, 자신에겐 실속이 없다. 악기의 속을 보라, 속이 비어있지 않은가"라고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되뇌었다.


그는 평생 그를 감싸고 억눌렀던 주위의 온갖 가난과 고통, 질투, 멸시, 천대등 모든 악조건들을 오로지 대금소리 하나로 평정하고 잠재워 자신을 이긴 승리자로, 일생을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허허롭게 살다간 진정한 예인이었다.


젓대... 그것은 바로 그의 생명이요 삶 자체였던 것이다.

출처 : 대금소리 지음회
글쓴이 : 대소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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