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교실

우봉 이동규 선생

솔도미 2007. 1. 20. 11:32
이동규 (가곡)
시조를 관현악 반주에 얹어 부르는 가곡은 우리 전통 성악곡 중에서 가장 기품있는 노래다. 시조를 5장으로 나누어 중간과 끝부분에 기악만으로 이뤄진 중여음(간주곡) 대여음(후주곡)을 덧붙인 가곡은 가사나 시조등 정가 중에서도 격식을 가장 중시하며 음악성이 뛰어나다. 발성도 통소리를 쓰는 민속음악에 비해 횡경막을 밀어올리는 복식호흡을 사용하고 어느 음역에서나 음색이 달라지지 않는 꿋꿋한 소리로 아름답게 부른다. 남창과 여창으로 나뉘며 선비들이 즐겨부르던 남창은 가곡의 이같은 특징을 특히 잘 드러낸다.

이동규씨(49.국립국악원 원로단원.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준보유자)는 선비의 기품과 풍류가 담긴 남창가곡의 이같은 맥을 대를 이어 지키고 있는 가객이다. 5대째 국악가계를 지켜오고 있는 그는 정통국악가계 출신으로 고조부가 조선 고종때 궁중아악부 전악을 지낸 정악의 거봉 이인식, 증조부가 피리의 명인이며 아악부 낙수장을 지낸 이원근, 조부가 아악수장을 지낸 이수경이며 선친 이병성은 가곡의 명인으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다.


"가곡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다가 옷매무새를 다듬고 앉아서 즐기던 격조 높은 노래입니다. 요즘은 판소리 등 민속 음악에 비해 보급이 잘 안되고 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우리 전통 음악 중 가장 품격 있는 가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예전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명망 있는 음악가족의 장손으로, 30여년 우리 가곡의 맥과 멋을 지켜온 명인으로서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고려시대에 발생한 것으로 전해지는 가곡은 원래 만대엽과 중대엽 삭대엽의 세 가지 종류가 있었으나 만대엽과 중대엽은 너무 느려 고려말에 이미 사라졌고 지금 전해지는 것은 모두 자진한닢이라고 불리는 삭대엽뿐이다.

고려시대에는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이 대표적인 가객으로 꼽혔고 조선시대에 는 박효관 안민영 등이 명성을 날렸다. 오늘날 전해지는 가곡은 모두 하규일의 유음으로 당시까지 구전돼 오던 남창 89곡, 여창71곡을 1931년 가곡집 [가인필휴]에 집대성했다. 오늘날 하규일 가곡의 맥은 이병성과 이주환을 통해 이동규씨에게로 이어졌다.

이동규씨는 해방 직전인 45년 4월16일 서울에서 뿌리깊은 국악가족의 7남매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장손에게 가업을 잇던 전통에 따라 홍은국민학교를 졸업 하자마자 무조건 부모의 손에 이끌려 6년제였던 국립국악원에 국악사 양성학교 (국악고등학교 전신)에 들어갔다. 하지만 처음부터 가곡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국악사 양성학교에서 처음 택한 악기는 가야금이었다.


"가야금이 악기도 크고 가장 멋있어 보였습니다. 소리도 제일 고운 것 같고 줄도 12개나 돼 어려워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가야금을 전공으로 삼았 지요."


당시 부친이 장안에 유명한 가객이었던 터라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도 노래보다는 악기를 택한 중요한 이유였다. 국악사 양성학교 시절에는 가야금 외에도 편경 단소 등을 두 익혔고 춤도 배웠다. 요즘 국악원 연주때 더러 편경을 연주하거나 집박을 하고 처용무공연에도 참가하는 등 국악의 팔방미인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에도 목청이 남달리 좋다고 칭찬을 숱하게 들었지만 군에 입대할 때까지 가야금에 매달렸다. 그래도 피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예술인 가곡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국악사 양성학교 3학년(중3)이 되던 해 선친이 세상을 뜬 이후였다. 8년 동안 병석에 있던 탓에 유산이라고는 쓰러져가는 초가집 한 채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7남매의 맏이로서 가장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대학진학 이나 가야금 공부를 계속할 여건이 못돼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생활고 때문에 밤무대에서 가야금 연주도 했고 무엇을 해야할지 방황하는 중에 주위의 질책과 권유로 아버지의 노래를 이어가게 됐습니다."


당시 그는 선친의 이왕직 아악부 1기 후배이며 선친과 함께 하규일의 수제자로 꼽히는 이주환을 찾아갔다. 이왕직 아악부는 5년에 한번씩 전수생을 선발했으니 선친의 5년 후배인 셈이었다.

어려서 부친의 노래를 어깨너머로 들었을 뿐 한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지만 그의 천부적 목소리와 재능은 첫눈에도 출중했다.


"이주환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좋은 소리를 가졌고 노래하는 자태가 기품이 있다며 기뻐하셨습니다. 가곡은 판소리와는 달리 자연적인 발성을 기본으로 하며 아랫배에 힘을 주고 뒷목으로 끌어올려 소리를 냅니다."


보통 가객들이 걸걸한 우조목이거나 구성진 계면목 둘 중 한 가지 특징을 갖게 마련인데 이동규씨는 우조 계면조를 두루 소화해내는 풍부한 음색과 좋은 음량을 갖고 있다.

가곡은 여러 면에서 시조와 비교되곤 한다. 시조가 가사전달에 중점을 둬 반주가 없으면 무릎장단으로도 불리우고 흥이 나면 즉석에서 지어 부를 수 있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인데 비해 가곡은 음악성을 중시해 반드시 세피리 대금 해금 가야금 거문고 장고, 경우에 따라서는 양금과 단소까지 곁들이는 관현악 반주에 맞춰 좌정한 채로 부른다.


"목소리가 악기인 만큼 좋은 성대가 가장 중요하지만 품격을 따지는 예술이기 때문에 앉아서 부르는 자태도 중요합니다. 곡이 끝날 때까지 땀을 닦거나 물을 먹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벌레가 물어도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판소리하는 사람이 부럽기도 하지요."


배우기 시작한지 딱 1년만인 72년에 제1회 전국가곡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차지했고 30대 초반에는 스승으로부터 가곡을 모두 전수받았다. 하지만 배움에 대 한 정열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때야 당대의 명인이던 선친의 노래를 전수하지 못 한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의 아호도 선친의 두봉을 쫓아 우봉이다.


"서울대 문화재관리국 등 선친의 노래에 관한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육성이 남아있는 것은 모두 모아 그것을 토대로 공부했습니다."


가곡의 한바탕은 남창 26곡, 여창 15곡으로 이뤄지는데 첫곡인 우조 초수대엽 에서 시작해 태평가에 이르기까지를 격식에 맞게 완창하려면 대개 4시간은 걸린다. 가곡의 곡수가 늘어나는 것은 여기에 시조시에 따라 곡이 달라지는 것까지 합쳐지기 때문이다.

당대의 명인을 아버지로 두고도 생전에 노래를 전수받지 못하고 뒤늦게 녹음을 통해 배웠던 그는 장남에게 가업을 계승하던 전통을 잇지 못하고 슬하의 1남1녀중 외동딸 현숙에게 가곡을 가르쳤다. 하지만 딸도 국악과 진학에 실패한 뒤 지금은 서울예전 연극과에서 [외도]를 하고 있다. 자신도 먼 길을 돌아온 때문인 지 딸도 언젠가 다시 가곡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가업계승에 느긋한 자세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수제자로 친아우인 정규씨(KBS국악관현악단 총무)와 김광섭씨(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 하주화씨(서울예전교수)등을 꼽는다.

초년에 고생을 하긴 했지만 가객으로서 그는 국내외의 공연과 후진양성으로 보람도 컸다고 회상한다. 공연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는 것은 73년 유럽 공연 당시 우연히 윤이상씨를 만났던 일이다.

그날 공연 사회를 맡았던 윤씨가 가곡이 프로그램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가객을 찾았다. 한국에 있을 당시 선친에게서 가곡을 배웠던 윤씨는 그에게 당시 준비해 간 빠른 곡 대신 느린 곳이 독일 청중의 호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고 즉석에서 곡을 바꿨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바꿔 불렀던 곡이 느린 속도로 부른 [태평가]였고 지금도 그는 이 곡을 가장 애창한다.


"평온한 하늘에 구름 하나 떠다니듯 그런 마음으로 부르는 곡입니다. 가곡은 마음을 편하게 해줘 심신수양에 좋습니다."


이화여대와 한양대에 출강하면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그는 가곡의 보급이 일생의 과제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다행이 가곡에 관심을 갖는 일반인들이 늘어 요즘은 은행지점장 교사 직장인등 비전문가 제자들도 있다고 한다. 언젠가 정악 합창단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그는 "날로 각박해지는 세상을 가곡을 통해 순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며 "자고 나면 늘어나는 노래방 대신 가곡 인구가 쑥쑥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맺었다.

국민일보 1994.10.15 0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