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가가객의 미학
정가가객의 미학
신경숙(한성대학교)
[한국학연구 10집 고려대학교한국학연구소. 1998.]
1. 정가의 새로운 해석자, 歌者
2. 정가가객의 소리미학
2-1. 다양한 해석차, 가변과 불변구조
2-2. 소리의 무한세계, 시김새
2-3. 一家를 이룬 소리들
3. 정가가객의 삶의 미학: 자유로운 삶의 추구
4. 마무리
1. 正歌의 새로운 해석자, 歌者
조선후기 가곡사는 가객의 등장없이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18세기 전후 가곡예술계의 큰 변화는 일반적으로 '담당층의 확대 또는 이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 등장한 가객의 활동은 前時期 가곡의 주요 담당층을 형성했던 士大夫들의 활동과 크게 변별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우선 조선후기 歌者들은 반드시 창작행위를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작품이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또하나는 이들의 연창 작품은 당대 것 뿐만아니라 조선전기 이래 대부분의 작품을 계속적으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이같이 歌者로 대표되는 담당층의 확대 또는 이동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동 레파토리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지난 시대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의 연구는 가객의 예술세계를 조명함에 있어 지나치게 문학창작품에 의지하여 왔다. 이러한 연구관행에는 예술성의 가늠은 창작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인식이 숨겨져 있다. 자연 이 시기 가곡은 소수 작가의 작품만을 주요 텍스트로 다루게 된다. 그리고 개인 창작품없이 지난 시절의 적층된 작품을 연창한 대다수 歌者들의 예술행위는 과거적인 것의 재연, 재구성 정도로밖에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문학과 음악을 아우르는 장르인 가곡에서 소리로부터 문학 텍스트를 분리한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물론 이는 연구자가 전 연구영역을 다 포괄할 수 없는 불가피한 연구현실의 사정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가가객의 등장과 활동에서는 소리와 문학적 텍스트를 분리할 수 없다. 특히 조선후기 전문가자들의 등장은 노래 예술사에서 소리가 그 자체로 미학적 가치를 보증받게 되는 시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歌者들의 진정한 텍스트는 같은 악곡, 같은 사설까지 포함한 '소리 연주' 자체이다. 이제 조선후기 정가가객들이 성취한 미학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名歌의 창작품'에서 '수많은 歌者들의 소리'에로 연구관점을 확대해야 한다. 텍스트를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작품없이 활동한 수많은 歌者들의 연주행위와 그 예술적 성취에 주목케 한다. 이러한 시각의 전환에 서서 가자들의 예술행위를 바라보면 그 중심은 끊임없는 기존 작품의 '재해석'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전통시대 악곡들이 흔히 그렇듯 가곡의 樂曲은 작곡이라는 창작행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연주행위의 결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변주곡들이다. 이는 비단 악곡에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다.
辭說 역시 넓은 범주에서 본다면 악곡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즉 기존 노랫말의 선별 작업과 계속적인 가창은 그 자체로 이미 중요한 예술행위였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歌者들의 연주행위는 끊임없는 작품의 '새로운 이해 과정' 또는 '해석 과정'이다. 새로운 해석없이 2,3백년 내지 5백년 이상을 내려온 노래가 거듭 불리울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歌者들은 당시 전승되던 '정가의 새로운 해석자'이다.
본고는 歌者들에 의해 正歌가 어떤 방식으로 새로이 해석되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를 새로이 획득해 가객의 미학을 구성해 가는지를 살피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크게 두 방향에서 작업이 이루어질 것이다. 첫번째 방향은 歌者들이 스스로를 전문가로 자처하며 행한 '音의 새로운 해석'을 살필 것이다. 가객 활동의 본령이 '歌唱'에 있는 바, 소리야말로 가객미학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방향은 소리미학의 원천을 마련한 '歌者들의 삶'을 조명할 것이다. 이들이 전문인 歌者로 살아갔다는 점에서 일반인과 다르게 새로이 설정한 '노래와 삶의 관계' 미학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2. 정가가객의 소리미학
2-1. 다양한 해석차, 가변과 불변구조
歌者들은 단순한 가창 기능인이 아니다. 이들은 당시 전문가로 자처하며 여항에서 음악활동을 벌인 예술가였다. 이런 의미에서 가자들은 노래를 통해 자신만의 의미세계를 창출해내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노래에는 자기 예술세계가 구축되어 있었으며, 동일한 노래를 부르나 저마다의 개성, 세계관, 인생 이해의 깊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추구되었다. 여기서 그 예술성의 실제 구현은 '작품'이 아닌 '연주'로 나타나게 된다.
연주를 통해 이러한 자신의 해석의 깊이를 들어낸 예를 '宋 '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18세기에 활약한 송실솔의 본명은 宋用世이나 송실솔이라는 별명이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어느날 당시 왕실이었던 西平君의 거문고 반주에 맞추어 두 곡의 가곡을 부르게 된다. 이 연주장면은 18세기 가곡연창의 實演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드문 자료이기에 주목해 볼만하다.
당시 서평군 공자 표는 부자로 호협하였으며, 성품이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실솔의 노래를 듣고 좋아하여 날마다 데리고 놀았다. 매양 실솔이 노래하면 공자는 으레 거문고를 끌어당겨 몸소 반주를 하는 것이었다. 공자의 거문고 솜씨도 또한 일세에 높았으니 서로 만남이 더없이 즐거웠다. 공자가 일찍이 실솔에게 말하기를
"네가 부르는 노래에 따라서 반주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느냐?"
실솔은 곧 만조(曼調)로 후정화의 가락에다 취승곡(醉僧曲)을 불렀다.
장삼을 잘라내어
님의 속옷 지어 주고
염주를 끊어내어
나귀 후거러 만들고녀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
어디 가서 살고
이리로나 가보세
창(唱)이 겨우 제3장으로 넘어갔는데 문득 쨍- 하고 중의 바라 소리를 내었다. 공자는 얼른 술대를 들어 거문고의 배를 두들겨 장단을 맞췄다. 실솔은 또 낙시조로 바꿔서 불러 황계곡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 아랫 장(章)에 이르러선,
벽상에다 그린 황계
모가지 길게 뽑아
두 나래 탁탁치며
꼭기요 시 - 유
하더니 수탉이 꼬리 끄는 소리를 지르고 껄걸 웃어댔다. 공자는 바야흐로 궁성을 울리고 각성을 쳐서 여음을 내다가 쓰르렁해서 그만 맞추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든 술대가 떨어졌다.
여기서 이때 부른 취승곡, 황계곡 두 가곡은 모두 {(진본)청구영언}(1728)에 수록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역시 창작 아닌 기존 작품이다. 실솔은 이 두 노래에서 각각 독특한 소리를 내어 서평군으로 하여금 반주에 어려움을 겪게 한다. 그런데 이때 이 특이한 소리를 연주한 부분은 모두 제 3장에서 이루어졌다. 새로운 연창 시도가 두 노래에서 다같이 三章에서 모색되었다면, 이는 일시적 감흥에 촉발된 객기쯤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변화의 시도가 허용되는 어떤 규칙성에 이끌린 자유로운 曲 해석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가곡에 있어서 詩語와 旋律은 어떤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단 논의를 예각화 시키기 위해 가곡 시어와 선율구조의 전반적인 설명은 줄이기로 하겠다. 본 장의 목적이 송실솔에게서 시도된 변화의 의미를 밝혀내어, 정가가객들이 추구한 해석의 가능성이 얼마나 다양한지 그 편폭을 드러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①한 악곡에 딸린 수십편 사설, ②한 악곡내 하나의 사설이라는 두 단계로 나누어 논의를 진행키로 한다.
첫째, 한 악곡과 이에 딸린 수십편 사설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가곡의 성악선율을 보여주는 것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가곡원류}뿐이다. {가곡원류}에는 각 노랫말의 옆에 창자들만이 알 수 있는 連音標를 그려넣어 노래선율을 아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연음표는 노랫말 전체에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연음표가 나타나는 부분을 조사하면 어떤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 가곡의 五章 형식은 다시 그 안에 '初頭' '二頭'의 작은 선율 단위를 갖는다. 이 단위에 따라 연음표가 나타나는 부분을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는 노랫말을, ∨는 연음표를, ⌒는 연음표 간의 연결구실을 의미한다.
<표1>
⌒
∨ ∨ ∨
1장 ○○○. ○○○○.
초두 이두
⌒
∨ ∨ ∨
2장 ○○○. ○○○○.
초두 이두
⌒ ⌒
∨ ∨ ∨ ∨ ∨
3장 ○○○ ○○○○. ○○○. ○○○○.
초두 이두
∨
4장 ○○○.
⌒ ⌒
∨ ∨∨∨ ∨
5장 ○○○○○. ○○○○○○○
초두 이두
위 표를 통해 볼 때 {가곡원류}에서 연음표 사용은 대체로 두 가지 경우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각 장의 초두 첫머리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앞과 뒤의 연결관계를 전제로 사용된 경우이다. 연음표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각 장의 초두는 연음표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만큼 변화의 가능성이 많음을 뜻한다. 연음표가 없는 부분, 특히 이두의 꼬리부분은 고정선율 부분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의 악곡은 가변선율과 고정선율이 결합하여 그 곡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연음표는 하나의 악곡에서 가변선율의 유형을 지시하는 것이고, 이 가변선율은 각 악곡이 허용하는 변형의 범위안에서 변형유형을 택하게 된다. 이때 주목할 것은 한 악곡에 여러 편의 사설이 올려지게 되면 사설에 따라 부분적인 선율 변형이 일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가곡의 가변과 고정선율의 구조는 노랫말에 따라 다양한 변형선율이 선택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놓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곡원류}를 편집한 박효관.안민영의 가곡활동은 19세기 전반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연음표가 말해주는 가변과 고정선율 구조 속의 다양한 선율유형들은 이미 그 이전 시기부터 형성되어 있었을 터이니, 그 시기는 적어도 19세기 초 내지 18세기 말 이전이 될 것이다. 연음표는 초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가곡을 이미 배운 사람, 즉 歌者들의 기억을 돕기 위하여 고안된 기보법이다. 이처럼 가자들은 같은 악곡내에서도 사설마다 다양한 선율을 선택하며 자신들의 음악세계를 가꾸어갔던 것이다.
둘째, 한 악곡내 하나의 사설에서 전개되는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자 송실솔의 경우를 알아보기 위해 막바로 가곡의 제3장부터 논의를 시작하기로 한다. 위에서 살핀 可變과 不變의 규칙 속에서 3장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갖는다. 3장의 구조를 알아보기 위해 한 작품('여창가곡 계면조 이수대엽')을 예로 들어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2>
1장 <초두> 언약이 <이두> 느저가니
2장 <초두> 정매화도 <이두> 다지거다
3장 <일각> 아침에 우든 가치 <이두> 유신타 허랴마는
- 중여음 -
4장 그러나
5장 <일각> 경중 아미를 <이두> 다스려 볼가 허노라
- 대여음 -
우선 장단에 있어 노랫말 각 음보 첫 음절은 일반적으로 합장단이 놓인다. 예를 들어 "언약이"에서 강박을 유도하는 합장단이 놓이는 부분은 위 <표2>에서 밑줄 친 부분이다. 우리말 어절의 강세구조와 음악의 강약구조가 자연스럽게 일치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3장 이두에서는 "허랴마는"의 "허"는 합장단이 아닌 쿵장단에 排字되어 있으며 그대신 "는"에 합장단이 나타나는 破格을 보인다. 이렇게 되면 "허랴마는"의 단어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허랴마- 는"과 같이 쪼개어지게 된다.
또한 3장의 終止는 다른 장의 종지와 다르다. 즉 1, 2, 4, 5장 모두 下降 종지로 끝난다. 그런데 유독 3장의 종지만은 上向 종지로 되어 있다. 또한 종지선율의 시김새에서도 평조와 계면조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3장만은 평.계면조가 동일한 시김새로 전개된다.
이상의 사실은 가곡에서 3장 특히 二頭 부분은 매우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면 이러한 3장의 구조는 어떤 의미를 띄는 것일까?
가곡의 선율구조는 1장(32박)과 2장(27박)이 댓구로 받다가, 3장(37박)에 이르러 풀어나가는 전개를 보이고, 중여음(16박)의 반주를 거쳐 4장(27박)에 이르면 단 3음절로 한 장을 이루는 절정을 맞이 하고, 5장(48박)에 이르러 절정을 풀어내며, 대여음(53박)으로 넘어가 곡을 정리하게 된다. 이는 시조시의 율격구조와도 일치한다. 문학의 初.中.終章 형식에 따라 그 율격구조를 보면, 초.중장은 <小(平)-平-小(平)-平>의 비교적 규칙적인 흐름을 유지함으로써 각 章의 뒤에 무엇인가가 이어질 것을 예상케 하는 율격적 개방성을 띤다. 반면에 종장은 이 평명한 연속성을 차단하여 <小-過-平-小(平)>와 같이 호흡을 비대칭적으로 긴장시켰다가 풀어줌으로써 작품을 완결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같이 가곡은 선율과 시어 모두 서정성의 고양과 완결이라는 같은 형식원리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선율구조와 시어구조에서 4장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우선 단 3음절로 한 장을 이루면서, 이 3글자를 27박에 배자한다. 그런데 이 배자법을 보면 처음 2음절은 11박에, 나머지 1음절은 16박에 걸쳐 노래한다. 그래서 이 부분은 상당한 가창력이 요구된다. 3음절을 27박동안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노래부른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극적 효과인 것이다. {가곡원류}에서 4장의 연음표를 살펴보면, 다른 장의 연음표와 달리 '/'와 '('의 두 유형만 나타나고 있어 가변 선율유형의 허용을 4장에서는 고정 선율유형으로 절제하고 있다. 그만큼 4장의 독자성 내지 독립성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가곡의 긴장감이 여기에 모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시어에 있어서도 종장 첫 구인 이 부분은 감탄사와 같은 특별한 단어가 배치되어 있어, 시어와 선율이 다같이 절정의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가곡의 선율구조에서 3장의 특이성은 별로 고려되지 않고 있다. 1장과 2장을 거쳐 계속적인 3장의 전개가 중여음을 기점으로 4장의 전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어의 전개도 초장(1, 2장)과 중장(3장)의 규칙적인 호흡으로 인한 율격적 개방성이 이 부분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환은 예고도 없이 종장 첫 구(4장)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가곡의 구조는 그렇게 밋밋하지 않아서, 4장의 전환을 위한 치밀하고 극적인 준비는 사실상 3장 이두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은 오늘날의 歌者, 곧 여창가곡의 대가 조순자 명창이다.
실제 3장의 이두 끝 어절은 낮은 音高와 느린 속도의 선율진행으로 앞장에서 준비해 왔던 상승의 분위기를 누르러뜨리는 듯하다. 그러나 쿵장단과 합장단의 어긋나는 파격 배치, 그로 인한 단어의 쪼개어짐, 그리고 예상 밖의 상향 종지법의 등장으로 이 느린 속도의 선율진행은 클이막스 직전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긴장감은 한없이 치솟아 막바로 4장의 전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파격으로 짜여진 3장 종지법의 고정선율을 만나 다시 불변의 틀에 절제감있게 복귀한다. 그리고 중여음의 예비를 거쳐 4장의 전환점에 다다르게 된다. 긴장감과 절제미의 절묘한 조화인 것이다.
이상 가곡의 선율구조 특히 3장에 허용된 자유로움과 절제가 갖는 의미를 살펴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송실솔이 두 노래에서 모두 삼장 부분에 이르러 개성있는 변화를 시도했던 사실이 우연만은 아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가곡은 3장의 파격안에 또다시 해석의 여지를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속에서 '자유로운 曲의 해석 내지 재창조'는 온전히 歌者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송실솔이 이러한 선율구조속에서 어떤 해석의 길을 택해 들어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그가 부른 취승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장 長衫 더 즁의 젹삼 짓고
2장 念珠 더 당나귀 밀밀치 ?고
3장 釋王世界 極樂世界 觀世音菩薩 南無阿彌陀佛 十年工夫도 너 갈듸로 니거
4장 밤즁만
5장 암居士의 품에 드니 念佛경이 업세라
1장과 2장에서 승려의 필수 물품인 장삼은 俗人의 옷가지로, 염주는 당나귀 장식품으로 둔갑해 버린다. 1장과 2장은 음악적으로도 댓구를 이루어 시어와 선율은 매우 적절하게 어우러지며 醉僧의 심정변화를 보여준다. 3장에 이르러는 염불소리를 통해 "십년공부"의 구체적인 내용을 그 어떤 설명의 말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이제 장삼이나 염주같은 물건 정도가 아니라 십년동안 쌓아올린 공력마저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중은 세속적인 즐거움을 찾아 나선다. 바로 이 3장에서 바라소리가 등장한다. 합장단과 쿵장단의 파격, 상향 종지의 규칙이 존재치 않으면 결코 바라소리도 허용될 수 없다. 실솔의 변화시도로 보아 3장 이두의 파격 구조는 18세기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쨍'하는 소리는 무언가 양편을 나눈다. 즉 바라소리는 양자 사이를 서로 오가거나 넘볼 수 있는 두 가능성의 세계가 아니라, 명암의 대별처럼 선명한 가름을 가져온다. 이렇게 볼 때 바라소리는 佛力과 世俗 사이의 뚜렷한 경계선을 그어 준다. 한쪽에 종언을 고하는 소리이다. 唱者는 바라소리에 의해 스스로 이 사이를 주체적으로 가르며 의심의 여지없는 단호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라소리 없는 취승곡이라면 1장에서 3장에 이르기까지 이것 저것 다 내어 버리고 십년공부까지 버리는 계속적인 상승무드를 타면서, 흔들흔들 경쾌한 발걸음으로 저편에서 이편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바라소리는 이러한 걸음걸이를 단 한 번의 높이뛰기를 통해 새 세계로의 진입을 강하게 예고한다. 어떤 연주가 취승곡을 이해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연주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해석이기 때문에 연주에서 보여주는 답은 수없이 많을 수밖에 없다. 다만 실솔은 한 악곡내 하나의 사설에 맞는 선율내에서도 다시 자기만의 독특한 曲 해석을 시도했던 것이다.
다음 황계곡의 가사를 보자.
1장 노새 노새 매양 장식 노새
2장 낫도 놀고 밤도 노새
3장 壁上의 그린 黃鷄 수 이 뒤 래 탁탁 치며 긴 목을 느리워셔 홰홰쳐 우도록 노새 그려
4장 인생이
5장 아츰 이슬이라 아니 놀고 어이리
이 곡은 인생은 유한하니 맘껏 즐겨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낮에도 밤에도 한결같이 인생의 즐거움을 경험해야 후회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벽에 그린 황계 수탉이 울게 될 때까지 놀자는 3장의 내용은 '매양 장식'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강조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송실솔은 수탉이 꼬리 끄는 소리 끝에 웃음소리를 덧붙혔다. 그가 구사했던 구체적인 소리야 알 수 없지만, 초점은 수탉의 울음소리였다.
가사에서는 울었다고만 되어 있는 것을, 그는 수탉이 목을 빼고 울 때 '꼬리가 땅에 끌리고 울음소리가 묘하게 변해감'까지 포착해 내었다. 어차피 그림 속의 수탉이 울리야 없으니 그 울음소리를 상상할 바에야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을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의 닭'을 사실적으로 그릴수록 '그림 속 닭'의 생명없음은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3장의 초점이 여기에 있는데 송실솔은 이러한 대비적 진실을 더 밀고 나아갔던 셈이다. 역시 하나의 선율을 선택한 후에도 또다시 자기만의 개성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두 노래의 변화는 모두 고정선율 부분인 이두 부분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가자들의 곡 해석은 가변선율부분 뿐아니라, 고정선율부분에서도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개성적 표현은 송실솔과 같이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견지할 수 있었던 名歌者들의 연창에서 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자기 연주곡에 대한 송실솔의 해명에서도 확인된다.
공자가 묻기를
"내가 실수했다. 허나 네가 먼저는 중의 바라 소리를 내더니 뒤에 한 번 크게 웃은 것은 무슨 까닭이냐?"
"중이 염불을 하고 마칠 적에 반드시 바라를 쳐서 막음을 지으며, 장닭이 울음이 끝날 때는 꼭 웃는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그랬지요."
공자와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이는 송실솔의 연주기법을 다 이해하지 못한 서평군의 질문과 송실솔의 자기 해설이다. 그는 바라소리를 염불을 마치는 '막음'이라 설명한다. 醉僧의 바라소리는 십년공부를 제 갈데로 가도록 버려두고는 '상황전개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 '염불이 끝났음' 또는 '염불을 끝냈음'을 주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장닭의 웃음소리 묘사는 닭의 울음이 처음에는 우는 소리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지막에는 웃는 것처럼 변화된다는 송실솔 자신의 '세심한 관찰력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실솔의 이러한 곡 해석은 아마도 그의 연주때마다 자주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창을 그때 그때 記譜하였다면 송실솔 특유의 歌譜로 남겨졌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노래는 단순히 기존 곡의 재연이 아니라, 그 안에 이미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소리는 곧 새로운 의미인 것이다.
한편 가곡 3장은 위와 같은 구조와 변용 외에도 더 다양하게 열려져 있는 章이다. 즉 엇, 농, 낙, 편 계통 악곡에서의 3장은 노랫말을 얼마든지 늘릴 수 있고, 늘어난 만큼 장단을 늘여 곡을 짤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위 곡들의 3장 노랫말을 보면 가집마다 다양하게 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十年工夫 觀世音菩薩 南無阿彌陀佛 너 갈듸로 너니거라 ({永言類})
釋王世界 極樂世界 觀世音菩薩 南無阿彌陀佛 十年工夫도 네 갈듸로 니거스라({甁窩歌曲集})
壁上에 글인 이 홰홰쳐 우도록 노새글여 ({(일석본)해동가요})
壁上에 그린 黃鷄 숫 이 홰홰처 우도록 노 노 ({병와가곡집)
壁上에 그린 黃鷄 수 이 두나 치며 회회쳐 우도록 놀고놋 ({가보})
이같이 가곡 3장은 말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에 歌者들은 흔히 이 부분에서 목자랑, 곧 남이 못내는 자기 예술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송실솔의 변화 시도는 이러한 3장에 허락된 말 늘리기의 가변성에 기대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3장은 이두 부분의 '파격 구조'와 사설과 장단의 '가변성'을 동시에 지닌 章이다.
이상 송실솔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歌者들에 의해 수없이 다양한 해석과 의미의 재창조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 악곡내 딸린 수십편 사설마다, 그리고 한 사설은 다시 선택된 선율 안에서 자유로운 소리세계 구축이 가능했던 것이다.
송실솔의 창의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보다 먼저 실솔곡의 大家로 알려져 있었다. 실솔곡은 아래의 가곡이다.
귓도리 져 귓도리 에엿부다 져 귓도리
어인 귓도리 지 새 밤의 긴 소릐 쟈른 소릐 節節이 슬픈 소릐 제 혼자 우러녜어 紗窓여왼 을 드리도 오 고야
두어라 제비록 微物이나 無人洞房에 내 알리 저 인가 ?노라.
그가 이 노래를 어떤 방식으로 불렀지는 알 수 없다. 앞서 '장닭의 울음소리'와 '중의 바라소리'를 사실적으로 연출해 내는 특별한 재능을 지녔던 것으로 보아, 이 노래에서도 '귀뚜라미 소리'를 적절하게 구사해 내었을 법하다. 이는 예측일 뿐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명인 조순자씨의 경험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순자씨는 그녀의 스승 이주환 선생에게 여창 이수대엽 "버들은"을 배우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버들은 실이되고 꾀꼬리는 북이되여
구십 삼춘에 짜내느니 나의 시름
누구셔 녹음 방초를 승화시라 허든고
이 노래에서 "꾀꼬리는"은 "짜내느니"와 소리 선율이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이주환 선생은 "꾀꼬리는"의 가사는 꾀꼬리 우는 소리처럼 부르라고 가르쳐 "짜내느니"와 구별하였다고 한다. 악보는 같아도 가사에 맞게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교 습득으로 화려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노랫말에 맞는 절절한 곡의 의미를 살려내는 작업이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확인한 송실솔의 특기나 조순자씨의 전언을 통해 볼 때, 실솔곡에 자주 등장하는 "귓도리"의 어휘는 어쩌면 그의 장기를 한껏 발휘해 이 곡에 대한 송실솔 류의 새로운 해석을 하기에 적절한 것이었는지도 모든다. 즉 귓도리의 "긴 소리 쟈른 소리"를 모사해 내는 그의 솜씨가 "절절히 슬픈 소릐"를 이루어내어 가을날의 쓸쓸한 정취를 한껏 몰아가며 "무인동방"을 지키는 이의 울울한 심사를 귀뚜라미 소리로 토해내게 하였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송실솔은 서울의 가객이다. 노래를 잘 하지만 특히 실솔곡을 잘 부르기 때문에 '실솔'이란 별호가 붙게 되었다.
이 말은 그가 이 曲에 대한 당대 最高의 해석자라는 뜻이다. 즉 수많은 가자들이 실솔곡을 불렀지만, 그의 실솔곡이 주는 감동이 으뜸이라는 말이다. 송실솔의 노래는 바로 작품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이요, 동시에 자기 개성의 표현이고 새 해석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실솔'이라는 이름은 가곡 연주에서 보여준 그만의 독창적인 해석법 . 예술성에 대해 당대 사람들의 붙혀준 애정 표시로써의 藝名이요, 적절한 평가이다.
다른 차원에서 본다면 사람마다 다른 느낌, 즉 다른 의미 해석의 실솔곡을 불렀다는 뜻이 된다. 즉 가자들의 활동은 기능적인 창자라는 단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풍류 안에는 다시 여러 모양의 노래 해석으로 一家를 이룬 歌者들이 존재했고, 그들에 의해 노래마다 넘쳐나는 개성을 보였던 것이다. 절제된 형식을 견고히 유지하는 가곡에서 가자들은 가변과 불변의 균형안에서 끊임없이 자유로운 자기 해석을 추구하여 실로 다양한 소리세계를 창조해나갔던 것이다.
2-2. 소리의 무한세계, 시김새
가자들에 의해 다양한 音 해석이 일어나는 또하나의 경우가 시김새이다. 흔히 한국음악은 5개의 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음들이 만들어 내는 음의 종류와 빛깔은 실로 무한하다. 시김새는 이러한 우리 음악 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경우이다.
시김새는 어떤 음 'A'가 어떤 음 'B'로 진행하기 전 어떤 음 'A'자체가 변화되는 전 과정, 즉 '음의 변화덩이'를 지칭한다. 즉 하나의 음이 다음 음으로 진행해 가는 동안은 일정한 시간이 지체되고, 이 시간성 위에 일정한 힘이 가해지면서 처음 음은 어떤 모양새로 변화해 간다는 뜻이다. 시김새를 서양의 꾸밈음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더 잘 드러난다. 꾸밈음은 어떤 음 'A'의 앞이나 뒤에서 짧은 싯가의 다른 音高의 독립된 음들로 어떤 음 'A'를 꾸며 주는 기능을 하는 음이다. 이같이 서양의 꾸밈음은 싯가와 음높이가 분명하고 절대 변치 않는다. 철저히 절대음, 純音을 지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에 비해 우리 음은 한 번 낸 후에도 에너지가 가해지며서 음색과 음질을 변화시켜 가는 특징을 갖는다. 음을 낼 때의 방법과 낸 후의 방법을 모두 합친 것인 셈이다. 시김새는 바로 '삭이다, 곰삭다'라는 말로, 음이 움직여가며 이루어낸 꼴인 동시에 음이 삭혀져 완숙해지는 모양을 뜻한다.
그래서 한국음악은 음을 삭여서 내고, 낸 음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살아서 유지하도록 시김새가 작용한다. 현 독일 작곡자 중의 한 사람인 Martin Eberlein이 한국음의 특징을 다섯 개의 음이 아니라 수천 개의 음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 음의 개수는 음높이의 개수가 아니라 음 특성의 개수에 해당한다고 한 것은 바로 시김새로 전개되는 한국 음악에 대한 서양 음악인의 적절한 파악이었다고 생각된다.
시김새는 한국음악 전반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시김새가 달라지면 노래도 달라진다. 그래서 시김새는 노래의 계통을 결정 짓는다. 즉 시김새는 장르에 따라, 악기에 따라, 남녀에 따라 그리고 개인마다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령산'이 '수제천'과 다른 것은 '상령산'이 가진 독특한 표정 때문인데, 이 표정에 관여하는 여러 음악적 요인 중에서 음과 음의 관계 즉 음진행과 그에 내재한 시김새가 한 몫을 한다. 이런 이유들로 하여 일반적으로 시김을 한국음악의 주요한 특징, 예컨대 한국전통음악의 개성, 우리 음악의 핵심, 한국음악의 미학적 근원으로 파악한다.
시김새에는 여러 꼴이 있다. 搖聲, 轉聲, 退聲, 推聲이 그것이다. 요성은 흔들어 주는 소리인데, 여기에는 치키는 요성, 굵은 요성, 잔잔한 요성이 있다. 전성은 한 박 이내의 짧은 싯가에서 강하게 굴러 주는 소리이다. 퇴성은 음의 뒤가 흘러내리는 소리이다. 추성은 음의 뒤끝을 살짝 밀어 올려주고 다음 음으로 급히 진행하는 소리이다. 그런데 이를 시김하는 방식에 따라 나누어 보면 다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시김하는 방식의 하나는 음을 낸 후 다듬는 것으로 추성, 퇴성, 요성이 있어서 쭉 뻗는 것과 차별화한다. 또하나의 방식은 음을 처음 내면서 다듬는 것으로, 위에서 치고 들어가는 것, 아래에서 올리며 들어가는 것이 그 音高로 직접 들어가는 것과 차별화된다. 어떤 시김새는 이런 방식의 복합으로 느껴지는데, 흔들면서 내리는 것(退搖聲), 구르듯이 아래로 내렸다가 올리는 것(轉聲), 음을 낸 후 다듬기와 새음 들어가는 다듬기가 맞물려 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김의 방법을 사용하기에 우리 음악은 서양음악처럼 명쾌하나 밋밋하게 한 번 낸 音高를 변동없이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낸 음은 삭혀서 섬세하게 다듬어 맛을 들여가는 미적 형식을 띤다.
가곡처럼 느린 음악에서는 이러한 시김새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가곡의 느리고도 유동적인 특징은 메트로놈으로도 측정키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메트로놈은 서양음악의 리듬을 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으로 잴 수 있는 가장 느린 박이 1분에 40박이다. 그런데 가곡에서 가장 느린 이수대엽의 경우 그 배 이상 느린 20박 정도라고 한다. 그나마 실제 노래의 흐름은 더 유동적이어서 기계로도 정확하게 재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음악 중의 느린 음악, 즉 영산회상의 상영산 . 수제천 . 가곡의 "버들은"(이수대엽) 등의 곡들은 시간을 떠난 듯한 차원에 속한 음악이라고 한다. 앞의 독일 작곡가 Martin Eberlein은 정악을 "극도로 느린 템포와 오래 지체되는 음들의 미묘한 변화"로 이루어진다고 파악한다.
이같이 느리게 오래 지체되는 음의 변화과정은 시김새로 그 음색과 음질을 이루어가게 마련이다. 세월이 변했어도 여전히 노래가 느리고 거문고나 가야금 줄을 명주실로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이 느린 길이를 만들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명주실은 신축성이 있으며 비교적 단단하다. 시김새는 바로 이러한 신축성 있는 줄에서 자연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이 느린 길이를 우리의 시간의식으로 말한다면 '한 십분'에 해당한다고도 한다. '한 십분'은 신축성있는 넉넉한 십분으로 기계적인 시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심리적 시간을 가르킨다. 가곡에 있어서 자음은 빨리 모음을 길게 발음하는 語短聲長, 모음의 발음을 풀어 순수모음(ㅏ, ㅓ, ㅗ, ㅜ, ㅡ, ㅣ)으로 발음하는 것, 또는 순수모음으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매개모음(하, 호, 후, 흐, 히)을 삽입하는 것 등은 이처럼 느린 성악곡의 시김새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가곡에 있어서 시김새의 중요성은 현행 가곡을 채보한 악보에서도 드러난다. 이주환, 김기수, 홍원기의 가곡악보를 분석한 박미경은 이들의 악보에 어떤 음악적 정보가 어떠한 형태로 들어갔는가를 치밀하게 밝혀내주고 있다. 그녀는 口傳心受 방식으로 교육된 가곡 창자들의 노래가 일단 거의 비슷하다는 데 착안하여 그럼에도 악보가 다른 것은 "같은 노래의 채보를 달리 한 결과"라고 본다. 이러한 상이한 채보는 어떤 근거에 의해 결과된 것인지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그녀는 가곡 "버들은"을 집중 분석하였는데, 그녀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의 채보에서 서로 가장 많이 달라진 부분은 시김새 부분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시김을 어느 정도로, 얼마만큼,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악보에 남기느냐가 채보자들의 고민이요 노력이었던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이들은 시김새를 가곡을 가곡답게 만드는 관건으로 보고 이의 정확한 채보에 주력했다는 뜻이 된다. 가곡에 있어서의 시김새의 중요성은 조순자가 성악가이면서도 드물게 시김새를 분석하는 본격 음악연구를 시도한 것에서도 짐작이 간다. 조순자 명인은 가곡 선율의 핵심을 무엇보다도 시김새의 당위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
한편 박미경은 악보를 분석해 나가는 과정에서 악보의 시김새가 실제 노래연주에서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같은 부분의 시김새가 이주환과 김기수의 악보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결과가 실제 김월하와 조순자 노래의 시김 구사가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재 조순자의 노래는 이주환의 기보음형을 보이고 있지만, 김월하는 김기수의 표기대로 노래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일차적으로 조순자가 이주환의 제자이고, 김기수는 김월하의 노래를 채보한 일이 있다는데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 사이에 시김새의 해석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서로 달라지면 누구 것이 더 옳은가(아름다운가)라는 미학적 쟁점으로 들어가게 만든다고 박미경은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본고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차이는 그것이 순수이든 변질이든 이미 해석상의 다른 견해라는 것이다. 고인이된 김월하 노래의 시김새가 어떤 원리에서 그와같이 노래되었는지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조순자는 자신의 노래에 대해서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조순자는 자신의 글에서도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여창가곡은 얼핏보면 자유롭게 진행되는 듯 하지만 발음의 특수성과 성대울림이라는 보편성이 맞물려 한음 한음이 그럴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가지고 기본꼴들이 진행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기본꼴들이 시김새로 설명되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녀가 말한 "그럴 수밖에 없는 당위성"으로 진행된다는 언급은 분명 가곡에 대한 그녀 자신의 해석일 것이다. 어쩌면 모든 歌者들의 노력은 이처럼 끊임없이 노래 해석의 자기 당위성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누구든 그가 名唱이라면 이처럼 가장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당위'를 찾아내고 보여주는 歌者일 것이다.
이처럼 시김새가 달라지는 것은 바로 시김 자체가 하나의 해석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음을 삭혀서 맛이 들게 내야하는 방법은 지극히 주관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방법은 '불확정성'을 특징으로 한다. 삭이는 행위로 볼 때 충분히 삭이는 것, 불충분하게 삭이는 것, 익은 것, 설익은 것 등은 오직 心測에 의존해야 하는 주관적 판단에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하나의 음진행은 이미 다른 음으로 가기 전부터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므로 여기에는 상당한 '공력'이 들어가야 한다. 시김새는 개인의 공력에 따라 서로 다른 음질이라는 해석차를 만든다. 이 모두가 한 악곡, 한 작품이 연주될 때마다 무한히 다양하고 풍부한 해석이 가능함을 뜻한다.
이러한 시김새가 전통시대 가자들에 의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가곡 미학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면 조선후기 가자들의 활동에서도 시김새를 통한 曲의 해석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했을 것이다. 여기서 18세기 歌妓로 활약한 계섬의 노래 부르는 태도는 주목을 요한다.
악보에 따라 교습하여 수년의 과정을 거치니 계섬의 노래는 더욱 향상되어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하늘하늘 집안에 울려 퍼졌다.
"(노래가) 입에 너무 익어, 입으로 노래하면서도 마음은 잊고 있지요"
수년의 노래 공부를 끝낸 계섬의 노래 부르는 모습은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었다"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계섬에게 있어서는 입도 소리도 이미 그녀 마음의 통제하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大家의 경지에 이른 계섬의 노래는 오직 마음이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노래하는 태도는 두 번째 인용한 계섬 자신의 진술과도 일치한다. 즉 노래할 때는 입을 움직여 소리를 발하는 것인데, 이러한 입 움직임의 사실조차 마음은 잊고 있다는 뜻이다. 역시 입이나 소리가 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노래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마음으로 연주가 가능토록 만든 "입에 너무 익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이는 무엇보다 입에 익숙해서 입을 잊을 만큼, 즉 더 이상 입의 연주라할 기술적인 측면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노래에 대한 '文理'가 텄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音에 대한 文理는 바로 가곡에 대한 그녀의 연주법이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이 문리가 곧바로 시김새는 아니더라도 '가곡의 문리'라면 결코 시김새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시김새는 한 음, 한 번의 발성이 음의 변화덩이로 진행되어, 무한한 詩想의 상상세계로 이끌어간다. 이러한 시김새의 무한 세계는 문리가 터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입을 잊은채 마음으로 연주한다'는 노래文理에 대한 언급이 다른 사람의 관찰결과가 아닌 그녀 자신의 말이라는데 있다. '노래는 어떻게 연주되어야 마땅한가'에 대한 계섬의 소견인 것이다. 소리는 어떻게 연주되어야 하는가? 바로 입에 익숙하여 입의 움직임을 잊은채 불러야 한다. 이 연주법은 득음의 경지에서 작위적 노력없이 그 마땅한 바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오늘의 명창 조순자가 시김새를 이야기하면서 '한 음 한 음이 그럴 수밖에 없는 당위'로 되어 있다고 설명한 것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당위'를 따라 자연스럽게 노래를 불러가는 名歌者의 노래 태도는 예와 지금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송실솔이 3장 이두 부분에서 시도한 '바라소리' '닭의 울음소리'와 같은 개성 연출 역시, 기본적으로 시김새를 통해 가능했던 표현이요, 이는 시김의 문리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조선후기 가자들의 노래가 단 몇 종의 악곡에, 오랜 세월 적층된 가사를 반복하더라도 당대인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고 오히려 애호되고 풍성하게 향유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김새가 보여주는 소리의 무한세계 때문일 것이다. 동일 작품 또는 동일 악곡일지라도 가자들의 노래는 무한히 다양한 이해와 해석의 '되어감'의 순간 포착이었던 것이다.
2-3. 一家를 이룬 소리들
歌者시대의 개막은 새로이 해석된 노래의 물결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대 가자들의 연창이 기존 악곡, 기존 가사를 답습했으면서도 더 이상 전승곡으로가 아니라, 당대의 '누구 曲' '누구 調' 또는 '新調'라 불리우게 되는 것이 이러한 변화물결을 말해준다. 여기서는 소리만으로 당대의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파고를 일으킨 소리형태들과 그 전개양상에 대해 알아보기 한다.
우선 가자들의 활동은 소리개발을 통한 의미창출이라는 점에서 歌者 개인 특유의 스타일을 형성해 나갔음을 특징으로 한다. 자기 스타일의 완성은 먼저 계섬에게서 확인된다. 심노숭의 [桂纖傳]은 계섬의 노래가 한 스타일을 이루었음을 말해준다.
계섬은 서울의 이름난 기생이다. ....(중략)....태사 이정보가 늙어 관직을 그만두고(1763년) 음악과 기생으로 自娛하면서 지냈는데 공은 음악을 깊이 사랑하여 늘 곁에 두고 그의 재능을 기특히 여겼으나 사사로이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樂譜에 따라 교습하여 수년의 과정을 거치니 계섬의 노래는 더욱 향상되어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하늘하늘 집안에 울려퍼졌다. 이에 전국에 이름을 떨쳐 歌妓들이 서울에 와 노래를 배울 때 다 계섬에게 몰려들었다. (세상에서 이를 桂娘調라 일컬었다.) 학사대부들이 노래와 시로 계섬을 칭도함이 많았다.
계섬이 한창 활약하던 때의 노래를 세상에서는 '桂娘調'라 불러주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런데 '계랑조'라는 말은 바로 앞 부분의 "전국에 이름을 떨쳐, 歌妓들이 서울에 와 노래를 배울 때 다 계섬에게 몰려들었다"라는 말에 근거를 두고 사용된 것이다. 즉 지방 歌妓들이 서울에 와서 계섬에게 배우고자 한 것은 바로 '계랑조'이다. 그녀의 노래 스타일은 일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계섬은 이보다 앞서 16세 때에 唱을 배워 이미 이름이 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시 이정보 문하에 들어가 악보의 절차를 따라 수년의 노래공부를 더 하기에 이른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이 수년의 과정을 마친 후, 그녀의 노래는 '문리'를 터득하고 있었다. 결국 '계랑조'라는 말은 그녀의 창작품이나 장기있는 한 두 곡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녀가 터득한 노래문리가 스며든 그녀만의 노래 스타일을 가르키는 말이다. 그녀의 '계랑조'는 자신의 연주활동을 통해서 뿐 아니라, 歌妓들에게 행해진 교수를 통해서 더욱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학사대부들이 시와 노래로 계섬을 칭도함이 많았다"는 것도 단순히 인간 계섬에 대한 칭찬의 말이 아니라, 계랑조를 좋아했던 이들의 호응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스타일을 이룬 또다른 歌者로 역시 같은 18세기의 가객 이세춘을 들 수 있다. 그의 노래에 대해서는 申光洙(1712-1775)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當世歌豪李世春 당세의 歌豪 李世春은
十年傾倒漢陽人 십년동안 서울 사람들 경도시켰지
靑樓俠少能傳唱 청루 협소들 傳唱해 부르고
白首江湖解動神 白首로 강호에 늙어 귀신을 감동시킬 만하구나
九日黃花看 寺 구월 구일 국화 필 때 寺를 바라보고
孤舟玉笛上蟾津 외로운 배의 옥피리 소리는 蟾津에 오르네
東游定得吾詩足 東游에서 참으로 나의 詩 얻기에 족하니
此去聲名又滿秦 이번에 떠나도 이름만은 세상에 가득 할 것일세
이세춘의 노래는 당시 십년동안이나 서울 사람들이 애호하는 노래였음을 알려주는 시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세춘이 당시 부른 노래가 청루 협소들에 의해 그 창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가 노래를 잘 부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세춘 스타일의 노래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협소들이 부른 것은 바로 '李世春 傳唱'인 것이다. 마치 오늘날 가곡이 근세초 가곡의 대가 '河圭一 傳唱'이 전해진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광수는 이세춘이 가도 그의 '聲名'만큼은 남을 것이라고 한 것도 '이세춘 전창'의 노래 스타일을 말한 것이다. 그 역시 창작품 하나 남긴 바 없지만 {해동가요}의 [古今唱歌諸氏] 명단에 올라있을 뿐아니라, 여러 연행현장에서 활약하며 주가를 날렸던 것도 바로 그만의 노래스타일을 가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이미 앞에서 자세히 살핀 송실솔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歌者宋 傳]에서 보여주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연주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로 특유하고도 적절한 모사음을 사용하였을 것이라 여겨지는 그의 연주법은 그 자체로 일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그만의 스타일로 노래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솔' 곧 '귀뚜라미'라는 藝名 자체가 그의 창법 스타일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정가가객들은 같은 작품을 다루면서도 歌者 개인의 소리 양식을 만들어가며, 正歌를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시켜 나간 이들이다. 이들의 소리 활동이 점차 一家를 이루어감에 따라 가집편찬자들에게는 새로운 고심이 생긴 듯하다. 왜냐하면 作家가 아님에도 歌者들의 이름이나 활동을 가집에 기록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歌者들의 새로운 노래 스타일이나 해석법은 창작 못지않은 예술행위인 동시에 의미창조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변화는 {(주씨본)해동가요}의 [古今唱歌諸氏] 56인의 명단으로 처음 나타난다. {해동가요}는 앞 부분에 [作家諸氏]의 명단을 편집해 놓았고, 작품마다에도 작가명을 표기하였다. 그런데 다수의 작품을 창작한 작가도 또다시 가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즉 가자 명단은 작가제씨 명단과의 중복을 무릅쓴채 별도의 序까지 붙여가며 또다시 작성된 것이다. 이는 창작품이 있어도 연주 자체는 별도의 예술행위로 본다는 뚜렷한 인식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연주행위 자체를 예술활동으로 보는 자각은 한걸음 나아가 가집에 가자들의 활동내용에 대한 자취까지 남기려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가집이 가창대본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기록은 작품 또는 악곡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경우에 한정되며, 기록 또한 결코 일반화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종종 그 흔적을 남기게 되는 것은 그만큼 가곡의 중심이 창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님을 무의식적으로 노출시킨 것이다.
악곡과 관계되는 기록으로는 {(가람본)청구영언}의 두 기록이 눈에 띈다. 우선 이 가집은 서문이나 발문없이 막바로 악곡별 작품 편집에 들어가고 있다. 작가명은 매 작품이 시작되기에 앞서 '이름' 또는 '이름과 시대'만을 기록하는 매우 간략한 표기방법을 취한다. 그것도 이수대엽에서만 나타나고 삼수대엽 이하의 악곡에서는 일체의 작가표기없이 작품만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編樂幷抄'의 중간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노래와 附記가 병기되어 나타난다.
믈 알 細가락 모래 아모리 밟다 바잣최 나며
님이 아모리 나를 괸들 내 아옵던가 님의 안을
狂風에 지붓친 沙工갓치 깁픠를 몰나 ?노라
이 편은 본조의 옛날 안동의 한 명기가 상경했을 때 그 곡을 창영한 것이다. 구구절절 탕지의 태가 있으니, 이른바 낙시조이다. 이로부터 시작되어 서울의 호걸지사들이 듣고 흠모하여, 그 곡이 지금도 유전한다.
여기서 "믈 알 "는 이미 {(진본)청구영언} 이래 제 가집에 樂時調로 실려오던 노래이다. 따라서 安東妓의 이 노래에서부터 낙시조 악곡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낙시조는 '堯風湯日 花爛春城'의 풍도를 가지고 있다. 즉 태평시대 봄날의 넘쳐나는 농염의 표정을 갖는 음악이다. 이런 악곡을 "節節 蕩志의 態"로 불렀다면, 이는 노래가사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도록 그녀만의 독특한 소리세계를 만들어냈다는 뜻이 된다. 낙시조의 위 곡은 그녀에 의해 또한번 새로운 해석을 얻은 셈이다. 따라서 서울의 호걸지사들이 듣고 流傳시켰다는 것은 그 가사를 지칭하는 것도, 낙시조라는 그 창곡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그녀의 기법으로 가창된 새로운 소리 스타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은 '소용'이라는 악곡에 관련한 또하나의 기록이다.
아함 긔 뉘옵신고 건너 佛堂 東嶺僧 내 오러니
홀居士 혼자 자는 방안 무 일?라 와계오신고
홀居士님 노감토 버셔건 말겻테내 곳갈버셔 걸나 왓 내(653번)
이 일편은 예전의 악희지곡이다. 그런데 근자에 별장 박후웅이(그는 옛 상건의 아들이다) 청음의 청성으로(황종 태려 소상에 속한다) 한 곡을 따로 만들어서 관현에 붙혀 사람들의 이목과 마음의 樂을 기쁘게 하였다. 세상호걸들이 흠모하여 널리 입에 올리니, 이것이 이른바 소용이다.
이 노래 역시 박후웅의 작품은 아니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가집들에는 낙시조, 만횡청류 등으로도 분류되어 있다. 따라서 예전의 낙희지곡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기존 창곡에 얹어 계속 불러오던 노래를 박후웅이 따로 한 곡을 만들어 부르게 된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때 새로운 곡은 전면적인 창작 악곡이 아니라, 위 부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淸音의 淸聲으로" 만들었다.
淸聲이란 옥타브 위의 높은 소리를 말한다. 전통 악곡에서는 淸聲으로 변주시켜 曲을 만드는 경우가 흔히 있다. 대표적인 곡으로 "청성삭대엽"을 들 수 있다. 이 곡은 가곡의 마지막 곡인 "태평가"를 청성으로 변주시겨 만든 것이다. 소용 역시 청성으로 변주시킨 곡이라는 뜻이다. 현행 소용에 대한 연구결과가 이를 확인시켜 준다. 즉 소용은 삼수대엽에서 파생되었는데, 삼수대엽보다 빠르고 한 옥타브 높게 노래 부르도록 변주되었다고 보고 되어 있다. 결국 위 附記는 소용은 '기존의 삼수대엽을 청성으로 변주시켜 만들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하나의 변주기법이 새 악곡 '소용'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애호도가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믈 알 "가 악곡 낙시조의 하위로 한 스타일을 형성했다면, "아함"은 기존곡의 변주 시도를 새로운 악곡으로 정착시켜 만든 것이다. 一家를 이룬 歌者들의 소리가 "다양한 층위의 音 해석"을 내놓았던 것을 다시 확인케 된다. {(가람본)청구영언}이 가집의 절반이상을 일체의 附記없이 작품만 편집하다가 갑자기 이 두 노래에 이르러 위와 같은 기록을 불쑥 남기게 되는 것은, 바로 歌曲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歌者들 演奏活動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 때문인 것이다.
19세기 가집에서도 소리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계속된다. 우선 {(육당본)청구영언}의 " 에 뵈 님이 信義업다 ?것마 / 貪貪이 그리울제 아니면 어이보리 / 져 님아 이라 말고 로 로 뵈시쇼"의 작품은 前代의 가집부터 실려 오던 곡인데도 明玉의 이름을 달고 나타난다. 명옥은 경기 화성기생으로 1829년 정재에 출현한 바 있으므로, 명옥의 이름은 '명옥의 작'이 아니라 '명옥의 노래'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李漢鎭 편 {(연민본)청구영언}(1814)에는 이같은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우선 半痴의 것으로 기명된 8수의 작품은 이미 그 이전부터 여러 가집에 두루 실려오던 것들이고, 김용겸의 이름으로 실린 2수 가운데 1수는 농암 이현보의 작품이며, 앞서 살핀 바 있는 실솔곡 즉 "귓도리 져 귓도리"의 곡은 송용세의 실명을 달고 등장한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가집 편찬자 이한진과 함께 풍류현장에 있었거나 동시대인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오인이 아니라 편자의 의도, 곧 가창자를 밝히고자 함인 것이다.
이같이 19세기는 작품에 대해서 때로 창작자 의식보다 가창자 의식이 앞서는 경우도 있었다. 그만큼 이 시대는 '누구의 작이냐' 보다 '누가 불렀느냐'를 더 중시했던 것이다. 19세기 가집에서 전반적으로 작가 소개가 사라지게 되는 것은 이같은 배경하에서 가집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창작행위보다 연창 위주 향유에서 이제 작가는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 가집에서 창작이 대폭으로 감소하여 신출작은 20수 내외밖에 나타나지 않고, 그대신 당시 변화된 가곡 연창방식을 담아내기 위해 가집이 개편되는 것도 바로 가곡예술사에서 가창이 그 자체로 미적 가치를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가자들에 의한 가곡발전은 창작이 아닌 연주중심으로의 뚜렷한 행로였음을 살폈다. 이러한 흐름에서는 같은 작품이라도 호소력의 문제가 중시된다. 즉 창작품의 기대가 사라진 대신 익숙한 작품에서 진한 감동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자들의 시대는 연주를 통한 감동이 주요 관심이 되고 있다. 그 한 예를 19세기 중반 錦香仙의 노래에서 만날 수 있다.
내가 고향집에 있을 때 利川 李 五衛將 基豊이 퉁소 神方曲 名唱인 金君植으로 하여금 한 歌娥를 데려오게 하였다. 그 이름을 물은즉 錦香仙이라 하였다. 외모가 곱지 않아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당대의 풍류가 지목하여 보낸터여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모모한 친우들과 산사에 오르면서 금향선을 청하였는데 모두들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나 금향선이 춤을 추었을 때 그치라고 말할 수 없었으며, 다음에 그녀에게 時調를 청하니 그녀는 단정히 앉아 蒼梧山崩湘水絶之句를 불렀다. 그 소리 애원 처절하여 구름이 멈추고 들보 티끌이 날려도 깨닫지 못하니 앉은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時調三章을 부른 후 계속해서 羽界面 一編을 부르고 또 雜歌를 불렀으니 牟宋 등 명창들의 調格에 透妙하지 않음이 없었다. 실로 절세명인이라 일컬을만 하였다.
추한 외모 때문에 좌중의 풍류객들에게 전혀 기대할 바가 없었던 기녀 금향선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금향선이 춤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그녀가 시조를 부르자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녀가 부른 노래는 아래의 곡이다.
蒼五山崩 湘水絶이라야 이 시름이 업 거슬
九疑峰 구름이 가지록 로왜라
밤中만 月出東嶺?니 님 뵈온 듯 ?여라
이 작품 역시 금향선의 作이 아니라 18세기 가집부터 무명씨로 계속 실려오던 작품이다. 이토록 익숙한 작품이 한 名歌者에 의해 불리워질 때, 기대하지 않았던 청중조차 눈물을 흘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18세기의 송실솔이 '취승곡'과 '황계곡'을 그만의 장기로 불러 재껴 좌중의 사람들로 하여금 웃도록 만들었던 사실과 대비된다. 금향선 노래에 감동한 사람들은 이에 촉발되어 가곡 한 바탕과 잡가까지 다시 청해 듣게 된다. 외모를 그토록 꺼려했던 안민영이 춘정을 느꼈을 정도로 그녀의 노래는 감탄을 자아냈던 것이다.
창작이 현격히 줄어든 19세기에도 여전히 가곡이 향유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歌者들이 혹은 눈물로 혹은 웃음으로 청중을 사로잡을 만한 감동적인 소리세계를 가꾸어간데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도 前代의 작품을 선별 재수록한 가집들이 계속적으로 여러 종 유포될 수 있었던 사실 또한 歌者들에 의한 가곡연행에서는 '창작'이 아니더라도 '가창'을 중심으로 무한한 예술세계를 만들어갔음을 말해준다. 歌者는 전승되던 正歌를 연주를 통해 새롭게 해석하며 나선 이들이었고, 그 해석력은 매우 뛰어나 이들만의 창조의 세계로 이끌어 갔던 것이다.
3. 정가가객의 삶의 미학: 자유로운 삶의 추구
가자들의 소리연주는 이미 그 자체로 새로운 작품 해석이었음을 확인하였다. 演奏는 곧 歌者의 개성 표현인 동시에 세계관의 표명이었던 것이다. 자연 가자들 삶의 다양성 만큼이나 그들의 노래는 갖가지 해석법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노래해석은 한 개인 안에서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즉 세월이 지남에 따라 삶이 깊어지고, 이에 따라 노래 해석도 변하고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가자들의 노래해석은 그들의 삶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제 가자들의 삶은 그들의 노래세계를 어떻게 이끌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심노숭의 [桂纖傳]으로부터 시작한다. 심노숭은 그의 우거지 파주에서 살던 노년의 계섬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傳을 지어 준다. [계섬전]은 그녀의 진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가자 자신이 말하는 '노래와 삶'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준다.
계섬은 이정보에게서 노래를 배웠고, 이정보 사후에도 평생 그를 知音으로 여겼다.
李公(필자주:이정보)이 죽자(역자주:1766년 5월) 계섬은 마치 아버지 喪은 당한 것처럼 哭을 하엿다. 그때 궁궐에 큰 잔치(역자주:同年 8월)가 있어 局을 두고 준비를 하니 여러 기생들이 날마다 局에 모여 연습을 하였다. 계섬이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면서 공의 祭需를 돌보았다. 局이 공의 집에서 멀어 局의 관리들이 계섬의 노고를 불쌍히 여겨 말을 빌려 局에 까지 타고 오게 하였다. 또 그녀가 哭을 하다가 목소리를 잃을까 걱정하니 계섬은 哭도 못하고 훌쩍이기만 하였다. 葬禮를 마치자 음식을 마련해 공의 무덤에 성묘를 가서는 술을 한잔 마셨다가, 노래를 한 곡조했다가, 哭을 한 차례하다가를 반복하면서 종일토록 그러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공의 자제들이 듣고는 무덤 지키는 노비를 책망하니 계섬이 크게 恨하고 이로부터 다시 무덤에 가지 않았다. 한량배들과 노닐면서 술이 좀 들어가면 노래를 하였는데 왕왕 눈물을 그치지 못하였다.
이정보 문하에서 노래 교수를 받아 '계랑조'를 이룩한 계섬은 그가 죽자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슬퍼했다. 노래 스승은 아비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연연습 일정으로 바쁜 그녀가 조석으로 이정보의 祭需에 신경을 쓰자 관청에서는 말을 제공하기에 이른다. 당시 이정보의 집이 鶴灘 곧 현재의 서울 강남 학여울에 있었으니, 연습을 위한 局이 설치되었을 掌樂院 곧 현재의 서울 명동 입구까지는 거리로 보아 당시로서는 朝夕으로 오가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같이 말과 시간까지 특별 배려해줄 만큼 계섬은 官조차 무시할 수 없는 일급 歌妓였던 것이다. 그런 그녀는 장례 후에도 공의 무덤에 나아가 애도를 그치지 않았는데, 애도방법은 노래와 哭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이미 哭도 노래로 대신할 만큼 그녀의 노래는 삶과 분리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자들에게서 이같은 애도는 沈鏞의 사후에도 있었다. 심용이 파주에 장례되자 당시 심용 문하에 있었던 예인그룹, 가객 이세춘.금객 김철석.기생 추월 매월 계섬 등은 그의 무덤가 모여 "한바탕 노래와 한바탕의 거문고로 마지막 무덤 앞에 통곡"하였던 것이다.
가자들의 진정한 마음은 그것이 애도의 심정일지라도 노래로 표현되었고, 이 애도를 받아줄 줄 아는 知音은 곧 知己였다. 곧 예술은 그들의 삶 자체였다. 이정보 사후 계섬이 다른 풍류자리에서 "노래를 하면서 왕왕 눈물을 그치지 못하였"던 것은 이정보의 죽음은 知己의 상실, 곧 삶의 상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계섬은 이후 歌妓로서의 삶에 의미를 잃은 듯 市井을 떠나 시골에서 佛道를 닦는 은거생활에 들어간다. 이러한 불교로의 귀의 생활은 두 번에 걸쳐 일어난다. 처음엔 이정보 사후 서울의 富商 한상찬과의 호화로운 삶을 기뻐하지 않아 강원도 정선군 산중으로, 또한번은 권세를 잡은 홍국영의 命에 잠시 응했다가 파주로 돌아와 역시 불도를 닦으며 보살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여기서 한상찬의 財貨나 홍국영의 權勢는 일시적으로 그녀의 노래를 소유할 수 있는 있어도 영원히 묶어둘 수는 없었다. 그녀의 노래 삶은 재물과 권세로부터 그만큼 자유로웠던 것이다. 이러한 예술가 의식은 금객 김성기나 해금주자 유우춘, 그리고 화가 최북에게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그런데 계섬에게서 특기할 만한 점은 자신의 자유로운 마음, 또는 해방된 자기를 지키기가 여의치 않을 땐, 과감히 노래조차 버렸다는데 있다. 재물과 신분 그리고 청중의 열광으로부터 단호히 몸을 돌려 택한 산중의 삶은 곧 노래를 뒤로 하는 삶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단순히 노래 인생을 시작하였겠지만, 어느새 노래가 그녀 삶을 키워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녀의 삶은 이미 노래마저 넘어섰던 것이다.
짧은 베치마를 걷어 올리고 짚신을 신고 손에 조그만 광주리를 들고는 나물과 버섯을 따러 산과 강을 오갔다. 그러면서 밤낮으로 불경을 염송하며 조용하게 살았다.
심후의 집 뒤 산중에 숲으로 울을 삼고 깍인 바위로 섬돌을 삼아 초가는 오륙칸이요 창문은 둥그러니 그윽했으며 병풍.책상.술동이.그릇을 나란히 놓았는데 화사하고 깔끔한 것이 볼만했다. 집앞엔 조그만 밭에 채소를 심어놓고 있었으며 洞中에는 논 몇 마지기를 고용부쳐 경작해 자급하고 살면서 마늘과 고기를 끊고 날마다 방 안에서 불경을 염송하며 지내니 동네에서 보살이라 일컬었고 스스로도 보살로 살았다.
이 글들은 노래를 버린 후 초야에서의 생활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녀의 삶은 "짧은 베치마를 걷어 올리고 짚신을 신은" 모습에 "광주리를 끼고 나물과 버섯을 따러 산과 강을 오가는"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40세라는 한창 나이에 환호하는 청중을 뒤로 하고 나선 名歌妓가 택했으리라 여겨지지 않는 자유로우면서도 평범한 여염 여인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경기도 파주로 물러나왔을 때는 초가를 짓고 병풍.그릇 등 기명을 갖추고 채소를 심으며 자급하는 역시 서민 여성의 담박한 삶을 꾸려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직 신앙의 삶을 살았다. 기녀 신분 속에서도 계섬의 삶은 놀랍기까지 하다.
그녀에게는 노래도 불교도 일종의 삶의 형식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오직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삶만이 목적일 뿐인 것이다. 그녀가 자신만의 개성있는 노래로 '계랑조'의 一家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그녀가 끈질기게 추구해 온 자유로운 삶이 빚어낸 소리였던 것이다.
靑春은 언제 가며 白髮은 언제 온고
오고 가 길을 아던들 막을낫다
알고도 못 막을 길히니 그를 슬허 ?노라
이는 단 한 수 남겨진 계섬의 작품이다. 늙어갈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생을 노래한 것이다. 내용으로 보아 그녀의 노년기 정취를 읊은 듯하다. 이때는 이정보라는 知己를 잃은 후, 서울에서의 화려한 삶을 청산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갈 때이다. 이미 서울장안에서 숱한 사대부와 한량들 사이에서 인기 절정을 경험하고, 또한 수많은 지방 歌妓를 제자로 두어 자신의 '계랑조'를 가르치기도 했던 그녀였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삶이라 여기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노년을 맞이하는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노년의 계섬을 심노숭은 "그때 나이가 62세였는데도 머리도 세지 않고 말도 유창하게 하여 기운이 성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과장이 아닌 듯 1795년 정조의 화성행차인 '乙卯園幸'에 60세 계섬은 都妓의 자격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늙어서까지 계랑의 명성이 잦아지지 않았던 것인데, 심노숭의 진술처럼 이때까지 그녀의 젊음은 상당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작품에서 "백발" 운운한 것은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자신의 삶을 찾으려 애썼던 그녀 인생 노정의 굴곡들을 주체적으로 인식한 결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기녀들의 작품은 애정, 그리움이 주를 이루는데, 계섬의 작품이 인생 유한성을 노래하는 남다른 특색을 보이는 것도 그녀 자신만의 삶을 끈질지게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노래는 삶의 구비구비마다의 자기 표현이었던 것이다.
계섬이 삶을 위해 노래를 넘어섰다면, 반대로 끝까지 노래를 지킨 예를 歌妓 秋月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前略).....
自擬風流場 스스로 생각하길 풍류마당에
百年長豪奢 백년 내내 호사라리라 싶더니
世事飜奕棋 세상일 바둑판처럼 뒤집히고
人生逝瀾波 인생이란 물결처럼 흘러가는 법
連雲舊甲第 고대광실 구름 속에 연이었더니
秋草夕陽斜 석양빛 긴긴 해에 이울어진 풀이로다
今人賤古調 요사이 사람들 옛스런 가락 좋아하지 않고
所歌皆咬 부르나니 모두 시속의 천박한 소릴레라
...(中略)...
悲意託楚謳 비장한 마음 남방의 소리에 부쳐
南國歸來些 이제 고향땅으로 돌아오니
正似 江舡 마치 陽江 배 위에서
掩抑彈琵琶 나지막히 비파타던 여자처럼
中曲意慷慨 그 가락에 강개한 뜻 붙였으니
聽者皆悲嗟 듣는 이 모두 슬퍼하고 한숨 내쉬네
浮世本如此 세상이란 본래 이러하니
秋娘奈爾何 추월이여 그대 어찌하리
공주에서 선상된 기녀 추월은 歌妓로 서울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앞서의 계섬과 매월 그리고 이세춘, 김철석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한 기녀이다. 위 시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그녀의 노래가 時俗의 기호가 바뀌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대목이다. 이미 사년간이나 소리공부를하여 일가를 이루고, 수많은 풍류마당을 석권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그녀 자신도 "풍류마당에 백년 내내 호사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녀가 주로 불렀던 '古調'를 대중들이 더 이상 좋아하지 않자 귀향하게 된다. 앞의 계섬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노래를 버렸다면, 추월은 세상 취향이 바뀌었어도 그녀의 古調 노래를 지키기 위해 하향했던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노래를 지키는 것이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 노래를 지키기 위해 귀향하는 노년의 추월 노래는 더욱 비장함을 띠어 "듣는 이 모두 슬퍼하고 한숨" 쉬게하는 감동력을 주게 된 것이다.
이 추월이 전해주는 젊은 시절의 또하나의 이야기는 歌妓라는 신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대감은 자리를 벌이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들 일행이 문안을 드리자 대감은 대청으로 올라오라 하고 한 마디 부드러운 언사로 대해 주는 법도 없이 대뜸 하는 말이
"노래를 불러라"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으나 마지못해 노래를 불렀다. 初章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 곡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대감이 노기를 대발했다. 모두 아래로 끌어내리라 하니 거친 음성으로 꾸짖는 것이었다. "너희들, 전에 이판서댁 연회에선 노래면 풍악이 시원해서 썩 들을 만하더니 지금은 소리가 낮고 가늘며 느즈러져서 싫어하는 기색이 완연쿠나. 흥취라고는 조금도 없다. 내가 음률을 모른다고 하여서 그러는 것이냐?" 추월이 영리해서 얼른 눈치를 알아차리고 발명을 했다.
"연회가 이제 시작된 참이라서 소리가 우연히 낮게 나왔사옵니다. 죄송하오이다.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구름을 뚫고 들보를 뒤흔드는 소리가 금방 울려 나오도록 해 보겠습니다."
대감은 특별히 너그러운 용서를 베풀어 다시 부르도록 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대뜸 羽調를 발했다. 雜詞를 고창하되 어지러이 부르고 잡스러이 화답하니 도무지 곡조가 아니었다. 대감은 대단히 흥겨워서 부채로 책상을 두드리며 부르짖었다.
"좋다, 좋아! 노래란 마땅히 이래야 될 게 아니냐."
藝人들의 신분은 사대부의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들 예인들을 부른 正人君子 사대부가 도무지 노래가 무엇인지 모르는 위인이라는데 있다. 대뜸 노래하라는 命에 첫곡이 初章, 二章을 거쳐 아직 끝나기도 전에 노기 띈 불만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정인군자가 이 첫곡에 대해 화가 난 것은 "소리가 낮고 가늘며 느즈러졌"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첫곡이었다는 점에서 이 評은 당시 가곡 한 바탕에서의 첫곡 '중대엽'의 음악적 특징에 대한 언급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느린 곡에서 점차 빠른 곡으로 진행하는 한바탕의 기본도 모른채 歌者들에게 호통을 친 것이다. 사태를 간파한 추월은 '우조로 잡사를 어지러이 화답하는 노래'를 불러재껴 수습한다. 정인군자가 이들 예인들을 부른 것은 일전에 이판서댁 방문시 들어서며 들었던 '거문고 줄이 급히 구르고 소리가 고조된 잡사'를 기대했던 것이었다. 여기서 雜詞는 어지럽고, 빠르며, 소리가 높은 것으로 보아 사설시조 노랫말을 얹어 부르는 악곡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곡 한 바탕이 상당히 진행되어 騷聳, 弄, 樂, 編의 어느 곡에 이르렀을 때인 것이다.
여기서 추월의 回想은 歌者들의 신분적 한계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무취미한 사대부에게조차 노련하게 대처했던 사실을 추억함에 있다. 그래서 이 회상 장면에는 신분적 예속에 의한 한탄, 억울함, 갈등이 없다. 그대신 예술적 높이가 삶의 높이가 됨을 말해주고 있다. 즉 정인군자가 자신의 양반 신분에 구속된채 삶과 예술의 다면적 모습에 눈 어두웠다면, 가자들은 낮은 신분과 상관없이 오히려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가자들 삶의 다단한 체험과 굴곡 그리고 예술적 깊이가 그들의 인생을 원숙한 경지의 자유로운 삶으로 이끌어 갔음을 보게 된다. 名人들의 노래는 이러한 자유로운 예술가적 삶과 태도에서 무르익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송실솔과 왕실 서평군의 관계 역시 신분과 경제에 있어 불평등한 관계이다. 그런 이들의 연주대결에서 송실솔은 거침없이 자기 개성의 표현,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갔다. 송실솔은 신분과 경제의 차원 저편에서 知音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스스로의 자유로운 마음과 삶의 추구없는 송실솔의 노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세춘이 모친의 상을 당했을 때 실솔과 그의 여러 동류들이 몰려가서 조문을 했다. 문에 들어가 상주의 곡성을 듣고 실솔이 말하기를
"저건 계면조(界面調)이니 법이 마땅히 평우조(平羽調)로 받아야겠는걸."
하고 영전에 나아가 곡(哭)을 하는데 곡이 곧 노래처럼 들렸다. 들은 사람들이 전하여 웃음을 삼았다.
이세춘의 모친상에 조문을 가서 송실솔이 보여준 재기이다. 송실솔의 행동이 일반사람들의 평상적 사고와 태도에서 얼마나 자유로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행적들은 송실솔이 그만의 자유스런 삶을 추구하고 살아갔음을 넉넉히 짐작케 한다. 앞서 본 특유의 노래 스타일은 이러한 그의 삶에서 배태된 것이다. 李鈺의 立傳 동기도 노래속에서 삶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인간을 그에게서 발견한데 따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의 상업화는 예술가들을 패트론에게 물질적으로 더 의존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신분.경제적 예속과 자유로운 예술행위 사이의 자각과 갈등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럼에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제 연주에서는 수없는 자기 표현을 자유로이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같이 일가를 이루기까지는 자유스러운 그들의 삶이 고집스럽게 추구되는 일이 먼저 있었다. 다양한 노래 해석은 가자들이 끈질기게 추구해온 삶에서 묻어나온 것이다. 노래에는 그들의 인생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그들의 스타일을 창조해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삶이 노래를 만들고, 노래가 삶을 만들어 갔다. 무수한 소리 이해와 해석은 삶의 깊이와 굴곡에 따라 만들어졌던 것이다.
4. 마무리
본고는 대체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하나는 전문가자들의 소리를 통해 가객이 성취한 미학적 세계가 얼마나 다양했는가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다른 하나는 이처럼 개성있는 소리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자들의 삶에서 자유로운 자기 추구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예술은 창작행위이던, 연주행위이던 삶에서 빚어지는 것임을 가자들의 삶과 예술을 통해 확인한 셈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사에서 가자들의 활동은 주로 사회.경제적 측면에서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접근법은 조선후기 도시적 공간속에서 가자들의 풍성한 연행활동을 밝혀 주었다. 한편 이러한 연구경향은 정작 그들의 노래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고, 노래의 실질적 내용들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나아가 그들이 추구한 노래 삶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는데는 미흡했다.
이에 본고는 가자들의 미학을 살피기 위해 그들의 소리세계를 밝히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가곡이 지나간 시대의 시간예술이기에 이에 대한 접근은 매우 피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쉽다. 그래서 본고는 가능한한 구체적인 실상이 잡히도록 논의 진행을 현미경 다루듯 정밀히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역시 소리예술의 구체물을 잡아는데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는 전문가자들의 소리세계 탐색을 위한 작은 시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고, 이의 구체적인 연구는 계속적인 학제간 공동연구를 필요로 함을 다시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전문예인이 이루어낸 예술 미학적 세계는 무엇보다 그들 삶의 해석과 추구로부터 빚어지는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