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족보> 진주 하씨(河氏)의 부문에서 역대 중요 인물 중의 하나로 기술되어 있는 하규일 선생의 행장은 아래와 같다.
하규일(河圭一) 한말(韓末) / 자(字)·성소(聖韶) / 호·금하(琴下) / 관직·군수(郡守). 일찍이 서숙에서 한문을 배우고 20세를 전후하여 최수보·박효관에게 가곡을 사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중년 이후에는 관계로 진출, 한성부 소윤(漢城府小尹) 한성 재판소 판사를 거쳐 1909년(융희 3) 내장원의 문교정리위원 전남 독쇄관(全南督刷官), 1910년 진안군수(鎭安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에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 학감(學監)이 되고 정악전습소의 여분교실장(女分敎室長)을 지냈다. 1926년 아악부(雅樂部) 가곡(歌曲) 강사가 되어 가곡의 정통(正統)을 전했다. 저서·가인필휴(歌人必携)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서울, 日新閣, 1977)
하규일 선생의 가정은 세습적으로 가곡을 잘하여 재종(再從)되는 하순일(河順一), 삼촌되는 하준권(河俊權)이 다 당대의 선가(善歌)로 이름이 높았다. 선생이 가곡을 배우기는 하준권의 제자 최수보가 선생이었고 또 박효관에게도 배운 것으로 알려 있다.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야(野)에 있을 때는 이미 불혹을 넘은 왕성한 장년이었고 강산은 어느새 나라를 잃은 어두운 일월이었다. 젊은 시절 그토록 매혹되어 갈망하고 탐닉하던 음악의 세계에 회귀하여 깊은 인연을 맺고 그로 말미암아 우뚝한 권위와 더불어 불후의 명성을 들레이게 되는 계기가 너무 순리로 자연스레 풀린 사실에 우리는 하늘의 놀라운 섭리 같은 걸 느끼고 숙연하기까지 한 것이다.
선생은 정악전습소 학감에 취임하여 쇠운의 정악을 전수하는데 심혈을 경주하고 상다동(上茶洞)에 자리한 동소 여악분교실장을 겸하니 이것이 뒷날 기생조합과 관련을 가져 여악(女樂)의 보존과 신장에도 크게 공헌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보다 하규일 선생이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임명되거 아악부의 젊은 연주직과 아악생에게 가곡을 교수한 사실이야말로 선생의 보람된 업적은 다시 없을 것이다. 선생을 아악부에 초빙하기로 된 배경에 대해서 함화진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장악원(掌樂院)은 원래 음악과 무용만을 교습하였을 뿐이요, 가요는 악장(樂章) 이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일 궁중에서 가요가 필요할 때에는 민간의 가객(歌客)을 초청하였던 것이다. 이 때는 궁중에서도 가요가 그렇게 필요치는 않았다. 그러나 근 천여년 간 전통적 고전가요(古典歌謠)가 폐지하게 됨은 너무도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때 민간에서도 시대사조(時代思潮)에 따라 이것을 연구하는 이가 전연 없고 선생층(先生層)으로는 다만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씨 한 사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규일씨는 이왕직(李王職) 촉탁(囑託)에 임명되어 고전가요를 교수하게 되어 아악생뿐 아니라 전 직원에게까지 가곡·가사·시조를 가르쳤다." (<국악50년회고사(國樂50年回顧史) 제6장 敎授方法 '音樂生活'>, 함화진(咸和鎭) 國民音樂硏究會, 1966)
그로부터 선생이 작고하시기까지 장장 12년간 매일 아악부에 모시어 하루 두 세시간씩 열성을 다하신 강의는 또 엄중하기로도 유명하였다.
하규일 선생이 한 평생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남창·여창의 제자는 참으로 수다할 것으로 헤아리고 있다.
"아악부에서의 제자는 40명 가량인데 그 중 성가(成家)한 이가 7~8명, 후계자(後繼者)로는 아악수장(雅樂手長) 이병성(李炳星)이 있습니다." <유일(唯一)한 고가(古歌)의 권위 하규일옹(翁)의 장서(長逝) '조광(朝光)>, 함화진(咸和鎭), 朝鮮日報社, 1937)
그러나 이병성이 일찍 타계하고 이을 만한 제자가 없고 그 뒤 소남(韶南) 이주환(李珠煥)이 가곡에 정진하여 대가를 이루고 제자도 많이 배출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歌曲) 등 제41호 가사(歌詞)는 둘 다 그의 생전에 그가 보유자(保有者)로 인정된 종목들이었다.
하규일 선생이 아악부에 가곡 강사(촉탁)로 처음 나오신 때가 바로 우리 제3기 아악생의 입소와 맞먹는 1926년 4월의 일이었다. 선생은 꼭 인력거로 출강하셨는데 아악부에 인력거로 들고 나는 이는 아악사장 명완벽 선생과 하규일 선생 두 분 뿐이었다. 명아악사장이나 하규일 선생 함께 자가용 인력거이었다.
이 때는 이미 제1기, 제2기생이 모두 졸업하고 난 뒤여서 가곡 공부는 1기와 2기 졸업생의 합동반으로 이루어 가곡 교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가곡 강의는 그 연습실을 이용하고 있어 우리네 교실과는 벽과 닫혀진 유리창문 하나로 이웃하고 있었는데 선생의 강의는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하루 두 시간씩이 배정되었던 걸로 알고 있다.
연습실에는 32정간으로 된 가곡 보표(초장·2장·3장·중여음·4장·5장·대여음)가 그려진 흑판이 걸려 있었고 배우는 곡목에 따라 하규일 선생이 일일이 가사와 음고를 판서해서 가르치고 있었다.
선생의 교수는 철저하고 엄중하기로 정평이 있고 혹여 제자들의 수강 태도가 불만스러운 때는 그대로 수업을 중단하고 돌아가 나오시지 않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몇 번 있은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 반장격의 선배 두 셋이 댁에 올라가 백배 사죄, 두번 다시 죄과 없을 것을 굳게 다짐 두고야 노여움을 푸시고 나오셨다.
그런 엄격한 강의의 단면을 가람 이병기 선생의 일기초 중에서 들어 본다.
1927년 8월 25일
나는 아악소(雅樂所)에 가서 하규일(河圭一)씨의 시조교수(時調敎授)를 보았다. 앞 목소리니 뒷 목소리니 하며 대조(大調)로 내는 소리, 다만 오늘날 자기나 부르고 자기나 알 소리, 과연 어렵다 아니하지 못할 것이다. 아악 연습하는 청년들은 장단점수(長短點數)를 맞추느라고 두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선생에게 하기 어렵다는 말만 한다. 그러나 하나하나씩만이라도 오래오래 끊이지 말고 전해 갔으면 좋을 것이다. 조선 음악(音樂)으로는 오랜 것 높은 것이다.
(<가람문선(文選) '일기초(日記抄)'>, 이병기(李秉岐), 新丘文化社, 1966)
하규일선생의 가곡방송은 그리 자주 있은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때에 특별한 프로로 편성되어 방송되었는데 예를 들면 1월 1일 신년축하방송 같은 게 그것이었다. 신정 초하구 아침에는 제1방송(일어)은 이 바닥 명인급의 기다유우부시(義太夫節)가 방송되는 게 통례이었고, 제2방송(조선어)은 거기에 맞서 하규일 선생의 가곡을 방송하는 것이 정석처럼 되어 있었다.
아무튼 신정에 듣는 선생의 가곡은 각별한 감회와 의미를 갖는 것이 분명하였다. 자주 흔하게 듣기보다는 정초에나 또는 무슨 고유한 명절 때 그것도 선가 하규일 선생의 목으로 듣는 것이 청취자의 보람이요, 즐거움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3기에서는 가성 좋기로는 임장길군을 이르셨고, 다음으로 태재복군도 장래가 있을 제자로 아끼고 계셨다. 그러나 임군은 졸업후 얼마안가 요절하였고 태군도 졸업후 곧 아악부를 떠나 연극계(동양극장)에 종사하다가 광복후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애석하게 갔다.
그에 대면 좋은 목은 아니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정진한 이복길(주환)군, 체대한 편으로는 너무 곱고 가는 목을 가진 박창진군의 여창가곡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체소한 이복길군의 남창, 육중한 박창진군의 여창이 나란히 한 가곡무대는 아악 이습회 기념공연이며 그 밖에 자주 오르는 단골 곡목으로 유명하였다.
하규일 선생 돌아가시고 어언 50유여년이 되었다. 선생이 공들여 전수하신 정가(가곡·가사)가 고즈넉이 승계되고는 있으나 아직도 만족하고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서 송구한 마음이다.
아쉰대로 금하 하규일 선생 가곡상이라도 제정하여 선생의 업적을 현창하고 가곡 보급과 선양에 자뢰했으면 하나 그것도 미욱한 후학의 애틋한 바람일 뿐이니 서글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