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직아악부 양성소 제2기생(1922~1926)에는 몇 사람 참으로 타고난 자질과 발군의 기량으로 그 이름을 길이 드리우고 악원의 전통을 영예롭게 한 이가 있으니 유일한 생존자 심소 김천흥, 앞서(<국악소식> 전호) 소개한 바 있는 박성재가 그렇고 이번에 말하려는 이병성 선진이 그들이다.
이병성은 누대 장악원 세가의 직계인 것부터가 여느 악생의 경우와 크게 달랐다.
증조부 이인식, 조부 이원성, 부친 이수경 선생은 악원의 악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각기 전공인 피리, 거문고에 있어서 당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하나같이 대가이었던 것이 너무 우람스럽기만 하다.
이병성은 호를 두봉(斗峯)이라고 했는데 자호 같지는 않고 뒤에 누가 지었던, 그의 좋은 기량을 그렇게 상징하여 잘 어울린다고 밖에 말하지 못한다.
두봉은 동기에서 박성재, 강명복, 김선득과 더불어 피리잽이에 별러졌다. 증조부가 되는 이인식 선생이 그랬다지만 피리의 명수요 대가의 혈통에서인지 그의 피리는 참으로 그만의 특이한 음색이어서 이날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그것은 득음한 이의 영글고 영롱한 피리소리와도 또 다른, 그야말로 그만의 대쪽을 쪼개는 듯한 맑고 트이고 푸르고 씩씩하니 어디 가히 비류가 없는 피리 소리였다.
전날 이인식 명인의 피리소리가 하마 저랬을까 하고 생각도 하지만 알 수가 없다.
사람따라 저마다 목소리가 다르듯이 일관 피리(혀)를 입에 물어도 그 소리는 각기 다르게 퍼지는가 싶은 궁리를 혼자 해볼 때도 있지만 모르겠다.
아무튼 독특한 신비스럽기까지 한 그의 피리소리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두봉은 이수경 선생의 장자로 1909년 12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엔가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학교는 4년제인 장훈보통학교를 1922년 3월에 마치고, 그 해 4월 아악부원 양성소 제2기생으로 입소하였다. 1기생에는 이미 그의 종형이 되는 이병호가 있었고, 이병호의 전공 역시 피리였는데 재주가 비상하여 아악부에서 성실히 근무했으면 큰 기여를 할 재목이었는데 졸업 후 얼마안가 아악부를 떠나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보다 두봉 이병성이 전공인 피리보다 가곡으로 저문하게 된 내력이 실로 우연치가 않은 것을 들어야 하겠다.
장악원에는 가곡의 반주인 관현의 기악은 전해 오면서도 정작 노래는 이를 가르치고 배우지를 아니했던 것이다. 1926년 4월 비로소 민간의 가객 하규일 선생을 초빙하여 아악부에 가곡 뿐만 아니라 가사·시조까지를 전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가곡은 일청이조라고 이른다. 첫째는 목청이 청해야 하고 다음에 가락을 친다는 뜻이니 천부의 자질 없이는 대성을 이루기 힘들다. 이병성씨의 목청도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고 일컬을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타고났다. 그 자질에다 근세 정통 가악계의 오직 한 분 남았던 기숙 하규일 옹의 채찍이 가해졌으니 두각은 날로 두드러져 갔다. 목에서 피가 나는 수업 십 사년 마침내 일가를 이루어 어전에서까지 가곡을 할 영예를 입기에 이른 것이다."
(<인간문화재>, 예용해, 어문각, 1963)
두봉은 이왕직아악부 아악수보·아악수·아악수장·아악사를 역임하고 1940년 3월 일신상의 사정으로 아악부를 퇴직했다.
그러다가 1950년 2월 구왕궁 아악부 기술촉탁, 그 해 4월 국립국악원 개원과 더불어 동 예술사·국악사에 임명되어 복직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환도 이후 두봉은 심장병·신장병으로 괴로운 투병생활을 계속한다. 이 기간의 정황을 그림같이 묘사한 글이 있다.
"지나친 쇠약으로 귀까지 먹었다는 이씨는 드문드문 말을 이어 한다. 세습된 가통을 다음 대에도 전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분연히 '그럴 생각은 없다'고 말하며 차남 동규(16세)군이 국악사양성소에서 가야금을 배우고 있으나 '이는 대를 잇게 하자는 뜻이 아니오 여는 학교에 보낼 돈이 없는 탓이라'고 자학에 가까운 어조다."
2) 위의 책, 예용해
두봉은 끝내 약석의 보람없이 1960년 11월 2일 시외 구파발 자택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52세였다.
현재 차남 동규, 삼남 정규, 형제가 건실히 성장하여 국립국악원과 KBS국악관현악단에 각각 복무하며, 함께 선고의 유업인 가곡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 것도 두봉이 원했건 아니건 하늘의 섭리로 고즈넉이 받아들여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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