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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을 대표한 연안이씨 저헌 이석형가
덕천 (2004-11-18 오후 5:47:31) Hit : 225 Vote : 25
"조선조는 학문으로서 세상을 유지하였다. 조정에서 정승이나 대신이 된 사람들 중 에서 학문과 기예가 남보다 우수해서 권역안에서 이름이 났고, 3관(홍문관.예문관. 교서관)에서 서로 같이 문단의 맹주가 되고 골라서 뽑힌 사람을 두루 여러대에 걸쳐서 헤아려 생각해 보면 연안이씨가 제일 많았다."
(本朝以文持世, 朝廷推卿宰中長文藝者圈其名, 提衡三館, 主盟詞壇, 膺是選者, 歷屢世可數也, 惟延 李最爲多.)
이는 조선조에 92세를 살았고 철종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 정원용이 연안이씨 가문의 이조판서를 지내고 헌종의 시장을 쓴 호거 이약우(壺居 李若愚)의 신도비문의 첫머리에 기술한 내용입니다.
3천재(홍명희.최남선.이광수)인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와 사돈으로 우리나라 국학에 많은 공로가 있는 위당 정인보의 증조부이기도 한 정원용의 이 짧은 글에 모든 것이 요약되여 있다고 했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들 누구든지 잘 알고 있드시 조선시대는 상문정신의 학문을 숭상하던 선비의 시대였습니다. 고구려의 상무을 기점으로한 무사정신, 신라가 충효례등을 기본으로 한 화랑정신, 고려가 승려를 중심으로 한 불교의 자비와 호국정신입니다.
조선시대를 선비의 시대가 아니었다고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조선시대의 정신을 가장 잘 반영하면서 조선조를 이끈 가문이 연안이씨입니다. 신라가 그시대를 반영한 화랑등을 많이 배출한 집안을 명문이라고 한다면 조선시대는 선비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 단연 그시대를 대표하는 양반입니다.
선비란 무었인가? 문사철(文史哲)인 유학의 기본으로 하여 충효례의 정신이 몸에 배고 청렴하면서 가난하지만 기개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연안이씨가 모두 학문적으로 선비정신을 가지고 휼륭하게 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한 집안을 꼽는다면 선비적 학문의 주류를 형성해 이룬 집이 저헌 이석형의 집안입니다. 그래서 이석형의 자손을 가리켜 동촌이씨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성의 동쪽 연화방 명륜방등에서 그의 후손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위의 정원용이 비문을 쓴 이약우도 이석형의 자손입니다. 그래서 이석형의 자손을 예로 들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과거는 학문을 하는 사람의 가늠자입니다. 이석형은 과거가 시작된 이래로 역사상 처음으로 1년에 3번 장원을 한 사람입니다.
포저 조익이 쓴 이귀의 신도비문의 명에 저헌 이후에 현손인 월사 이정구와 5대손인 묵재 이귀가 나와 빛을 냈다고 합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의 꽃이 대제학을 지내는 것입니다. 그 대제학을 연안이씨가 7명이나 배출하여 광산김씨와 쌍벽을 이루워 연리.광김합니다.
그대제학을 월사에 이여 3대가 대제학(이정구.이명한.이일상)을 지냅니다. 부자대제학(이복원.이만수)등 6명의 대제학이 나옵니다.
첫글자에 문자가 들어가는 문강공 저헌 이석형에서 순종때 이도재의 문정공에 이르기까지 첫글자에 문자시호가 들어 가는 분이 24명이나 배출됩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크게 두 번으로 봅니다, 첫째는 저헌이 치평요람등을 편찬한 세종시대이고 둘째는 영.정조시대입니다. .
정조는 그가 쓴 홍제전서 일득록편에 연안이씨를 삼한갑족이라 칭했습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침체된 학문의 진작에 노력합니다. 이 규장각의 첫 번째 제학이 이복원입니다. 이 규장각 각신이 무려 14명이며 암행어사도 무려 17명이나 됩니다.
이러한 분들이 있으므로 그래도 그시대의 군주를 도와서 학문의 꽃을 피우고 충효례를 실천하여 뭇 사람의 존경을 받는 가문이 된 것입니다.
수백년동안 선비정신을 가지고 이러타 할 탐관오리도 없이 선비시대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래서 수백년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걸러지고 걸러진 조선시대의 양반입니다
연안이씨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아무리 학자가 주도한 선비의 시대라도 "지배계층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없다면 양반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저헌가는 휼륭하면서도 도덕적 의무를 충실히 대를 이여서 이행하였습니다.
대를 이여 가며 선비의 기본적 덕목인 학문에 힘쓰면서 충효례등을 실천하면서 나라가 어려울 때 마다 몸을 던진 역사적 사실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서술식으로 개진해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역대전란중 최대의 비극중에 하나인 7년동안 계속된 임진왜란에 한문학 4대가의 한 사람인 월사 이정구는 무술년 변무주로 명나라 조정을 감동시키면서 천하제일 문장으로 이름나며 우리나라를 글로서 위기를 슬기롭게 구해낸 첫 번째 사람입니다. 말 그대로 "펜의 힘은 총칼보다 위대하다" 를 보여주었습니다.
묵재 이귀의 장형인 이보도 임진왜란에 몸을 던저 의병을 일으킵니다. 이귀와 이보의 재종숙이자 월사의 6촌형인 이인서도 타오르는 촛불이 되어 의병장으로 활약을 합니다. 이보는 의병장으로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이귀의 신도비를 쓰고 월사의 행장을 지은 포저 조익은 이귀 집안과 겹사돈을 이룹니다.
특히 이인서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재종질인 이귀가 인조반정을 한 일등공신이 되고 재종제인 월사가 정승이 된 뒤에도 포저 조익이 임진왜란의 공로로 조정에 추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이인서는 동래부사로 장렬히 순국한 송상현과는 사촌동서간이기도 합니다.
그저 기회만 닿는다면 온갖 수단과 방법은 물론이고 없는 연줄도 만들려고 할 것이지만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말하자면 행동으로 도덕적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함께 쌍벽을 꼽는 대표적 전란인 병자호란에는 강화도가 함락되자 월사 이정구의 처 안동권씨 며느리인 이소한의 처 여주이씨(실학자 성호 이익의 대고모), 월사의 장손 며느리인 전주이씨(이일상의 처. 영의정 이성구의 딸.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의 손녀)도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손자인 이가상도 순국합니다. 이가상의 처 나씨(병자록의 저자 구포 나만갑의 딸. 수몽정엽의 외손녀)도 얼마 뒤에 따라서 죽습니다. 이와 같이 여자들도 선비가문의 여인들답게 절의를 지킨 것 입니다.
이귀의 종질 조카로 사계 김장생의 문인인 이시직도 송시열의 4촌형인 송시영과 함께 강화도가 함락되자 몸을 던저 장렬한 자결로 생을 빛나게 마감합니다.
또한 이정구의 아들 이명한도 유명한 척화5신의 한사람으로 청나라에 붙잡혀 갔으며 그의 손자 이일상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청국의 실상을 효종에 알리여 북벌계획에도 도움을 줍니다.
이귀의 아들 이시백도 백사 이항복 문하의 4우(이시백.장유.최명길.조익)인 선비로서 무신도 아닌 문신의 몸으로 신경진. 이서. 구굉과 함께 4대장으로 수석대장이면서 남한산성을 지키다 화살을 맞기도 합니다.
그가 죽어서 천안의 장지로 갈 때 수원을 지나게 되자 수원주민들이 나워서 모두 울었다고 합니다. 이시백이 죽기 30여년전에 수원부사로 선정을 했기에 그 공을 잊지 못해서 입니다. 10여년도 아니고 강산이 무려 3번이나 변한 세월에도 이시백을 잊지 않은 것 입니다.
그는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일생을 청렴하게 살아 청백리로도 선정되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큰 전란이 없었으므로 영조와 정조를 도와 문예부흥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규장각의 각신이 14명이나 된 다는 거죠.
시대가 흘러 조선조말엽의 일제침략기로 이여 지자. 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될 때 해방후 초대 국회의장을 지낸 해공 신익희의 장인으로 이조참판을 지낸 이명재가 민영환.조병세 등이 자결한 을사조약에 일제에 항거 자결을 합니다.
명성왕후의 시해와 단발령에 항거 승지를 지낸 이설은 고종사촌 동생인 김복한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22개군현을 거느린 홍주성을 점령하여 그 기개를 만천하에 드날립니다.
김복한의 처남인 이흥재는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매우 분노하던차 이어서 단발령이 나자 단발령이 난지 불과 11일만에 충북의 괴산의 향교말에서 단식끝에 피를 토하며 자결하여 개항이후 자의에 의한 일제에 항거 하면서 전국최초로 자결로 생을 찬란하게 마감한 사람입니다.
처남인 이흥재의 자살에 매형인 파리장서사건의 주역이기도 김복한은 어머니가 있으면서도 경솔하다고 하면서도 처남인 이흥재가 죽을 때 자신은 병신처럼 아무일도 못했다고 하면서 매우 분노합니다.
이흥재의 자결이 김복한과 이설의 의병에 직접적인 원인제공은 아니어도 간접적인 원인은 됩니다.
또한 유인석의 호좌의병도 이흥재.이인응.김봉환의 자결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이흥재는 이정보의 큰아들에서 큰손자로 이여진 5대종손입니다.
이정보는 조선조를 크게 전후반기로 나눈다면 후반기에 대제학을 지낸 사대부로 가장 많은 시조작품을 남기고 오상고절을 자랑하는 한떨기 국화꽃같은 기개높은 절의의 선비입니다.
오늘날 이정보의 문집이나 시조등의 작품이 현재 남아 있지 않은 원인중의 하나가 5대종손인 이흥재가 개항이후 일제침략에 항거 자의(自意)에 의해 자결한 최초의 사람이고 의병장 김복한의 처가이기에 일제의 탄압으로 자손들이 뿔뿔히 흩어저 제대로 문집등을 관리하지 못한 원인도 있습니다.
이씨가문으로는 족형(이헌재)과 족제(이흥재)의 관계이지만 처가로는 이흥재와 동서간이고 김복한에게는 고종사촌형인 이헌재도 외사촌인 김복한이 감방에 수감되고 손아래 동서이기도 한 이흥재의 자결등 거듭되는 상란에 분하여 목매어 죽었습니다. 말하자면 김복한은 처가(이흥재:처남)와 외가(이설:외사촌형),고모(이헌재:고종사촌형)가가 이 동촌이씨네입니다.
이헌재는 개화파의 대신으로 영선사로 청에 갔다 왔으며 조선조 말을 대표하는 학자인 김윤식과 사돈입니다. 동서가 자결한 이흥재와 이헌재의 처조모는 연암 박지원의 외손녀입니다.
충주성을 점령하여 위세를 떨친 을미의병을 대표하는 호좌의병의 핵심인사들은 다음과 같읍니다. 유인석 대장과 수안보 전투에서 전사한 이춘영이 중군장, 제천에서 전사한 안승우가 전군장, 신지수가 후군장, 김백선이 선봉장이고, 종사관이 이조승이었습니다. 유인석.이춘영.안승우.신지수.김백선등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종사관인 이조승은 불과 10대 소년의 나이를 탈피한지 얼마 안되는 22세의 어린 나이로 참전을 하여 종사관이란 주요직책을 맡습니다.
조선말 일제 침략기에 가장 빛나는 유인석 의병부대의 종사관 이조승은 유인석을 따라 중국에 까지 갔다가 의병전에서 입은 상처가 덧나 병들어 돌아와 28세의 젊은 나이로 유복자 하나를 남기고 병사합니다.
부모가 있어 동생과 함께 을미의병에 참전하지 못한 형 이주승도 뒤날 이강년 의병부대의 종사관이었습니다.
연안이씨는 학문과 연계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또 청렴하며 유능한 사람중에서 선발되는 암행어사가 17명이나 되여 다 예를 들수가 없어서 생각나는 대로 들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암행어사로 나간 분은 이명한 인조반정직후인 4월에 강원도 암행어사였으며 아들인 이단상도 암행어사로 부자가 암행어사입니다.
8문장의 하나로 동촌파 문장의 4명(이천보.오원.남유용.황경원)중의 하나인 진암 이천보는 영의정으로 젊은 당하관 시절 암행어사 였으며 죽어서 염할 옷도 없을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문장에도 뛰어나 정조대왕은 그를 조선시대 제일문장가로 꼽았습니다
그의 손자들이 암행어사가 되어 조손간의 암행어사에다 손자들인 이재수와 이우수가 형제 암행어사이기도 합니다. 이재수는 사돈인 익종국구 조만영도 암행어사이고 이우수는 처남인 추사 김정희도 암행어사입니다.
사도세자의 평양원유사건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결한 3정승(영의정 이천보,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 )중에 두사람이 저헌가의 사람들입니다
정조가 창시한 규장각의 각신이 정조이후에 14명이나 나와 음양으로 이나라 조선 후기의 학문 진흥에 최대의 공로가문은 연안이씨입니다. 정조는 규장각 각신중에서 공로가 많은 4각신을 지명하여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그중에 2명이 동촌이씨입니다. 정조가 초상을 그리게 한 이시원은 동생인 이조원과 함께 형제 암행어사입니다.
송자대전을 발간한 청백리 이명식은 아들인 이면응과는 부자가 암행어사이고 동생인 이명빈과는 형제암행어사입니다. 이면응의 사위인 심상규도 암행어사로 옹서간에 암행어사이기도 합니다.
조선왕조 첫 번째로 기로사에 3대(이철보.이복원.이시수)가 들어간 이철보와 이시수는 할아버지와 손자간의 암행어사이고 이성원과 이곤수는 부자가 암행어사입니다. 정조가 오래 살면서 학문에 힘쓰라고 수재(壽齋)라는 호를 지어준 한 규장각 대교였던 이곤수는 26세의 어린나이에 암행어사가 되었습니다.
위에서 단편적이나마 예를 든 이석형 가문과 같이 연안이씨가문은 시대정신인 선비정신을 구가하면서 지배계층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명문중의 명문으로 조선조 사대부 가문을 대표하는 대명사가 된 것은 한 두사람의 잘난 사람이 있어 차고 들어와 이루워 낸게 아닙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두사람 잘났다고 그 집안을 좋게 보지 않는 것은 똑 같습니다. 한 두사람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짧은 시일안에 이루워 진 모래성이나 사상누각과는 경우가 다름니다.
오랜 세월 수백년동안 정수기에서 정수된 물을 뽑아내듯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불리어 온 것입니다.
이미 옛날부터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처 왔던 거지 어느날 갑자기 된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 한다면 걸러지고 또 걸러서 향기 그윽한 좋은 술이 나오듯 한 것이지요.
아무리 오늘날 우리가 지난 세월을 더듬어 발자취를 살펴 보아도 그시대를 살던 사람같이 일목요연하게 좁쌀톨을 세듯이 명쾌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보지도 못한 증조부의 일을 증조부를 직접 보고 그 밑에서 자란 조부가 제대로 전하지 못하였다면 지금에서 그 시대를 평가해 보는것은 코키리 다리를 만저보고 그 크기를 가늠해 보는 것 같은 겁니다.
연안이씨 문중에서 많은 학자들이 나오고 영조와 정조시대등 평화시에는 묵묵히 군주를 도와서 학문과 문예의 진흥에 힘썼습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한말의 일제 침략기에 전쟁이 나면 의병도 일으키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도 버렸습니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주민을 위해 근면성실로 청렴과 정직으로 하였습니다.
17명의 암행어사가 증명이 되지 않습니까?
당하관중에서 유능하고 청렴하며 정직하고 강직한 사람으로 국왕이 선발해서 탐관오리를 적발하고 잘못된 정사를 바로잡게 하는 것이 암행어사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참봉사"를 실천한 것 이지요.
벼슬을 내놓으면 농사지으면서도 주민을 계도하면서 열심히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남들이 "조선의 명문은 연안이씨다." 한 것입니다.
벼슬을 할때는 청렴하게 벼슬을 하여 살아 있을 때 생사당이 세워진 분도 있습니다.
왕비나 왕의 사위가 되신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배운 학문을 실천하면서 조선조 학문의 진흥에 힘을 기울인 것 입니다.
물러나 있더라도 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초야의 선비로서 의병으로 나갔고 돌아와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경노효친하며 농사를 지으며 이웃의 위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면서 향약을 실천하는등 지배계층으로 의무를 다 한 것입니다.
정원용의 말대로 문치시대에 학자가 가장 많이 나왔고 또한 르네상스시대인 영조와 정조시대를 활짝 꽃피운 학자들이 위에서 언급한데로 많지 않습니까?
시대의 정신사조가 선비의 정신을 구가하던 시대라 는 것을 알아야지요.
이름난 무신은 없지만 이시백과 같이 무신들 보다도 더 용감하게 싸운 분들도 있습니다.
옛날이나 현재이든 당연히 총칼을 들어야 할 현역 군인의 몸으로 나가 싸우는 것과 군인이 아닌 신분으로 나가 싸우는 것과 어느 것을 더 높이 평가해 줍니까?
선비로서 농사를 짓다가 또 국난을 당하면 초야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국가가 위난을 당했을때 목숨걸고 일어섰던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것이 선비정신을 지탱해온 힘이기도 합니다
한국명문
보학에 해박하신 덕천님의 글은 여러 사람에게 감동을 줄 것입니다. 특히 자라나는 다음 세대들이 꼭 알아야 할 글을 올
려 주셔서 감사한 마음 그지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글을 여러 차례 올리셔서 가문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
움이 되리라 생각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을 올려 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4-11-18 오후 7:26:00
나그네
월사 이정구는 서인으로 알고 있는데, 남인인 이수광, 이성구와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군요.. 성호 이익
도 그렇고... 당시에는 당파가 달라도 혼인이 가능했던 시기였을까요. 2004-11-18 오후 11:36:00
나그네
무엇이 선비정신을 대표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군요. 예로 든 경우는 우리나라 명문치고 그러하지
않은 집안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연안이씨답게 글이 수려해서 좋지만 알맹이는 없고 남는 게 없어
눈을 흐릿하게 할 뿐........그렇다고 연안이씨가 명문이 아니라는 말은 아닙니다.
지배계층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없다면 양반이라고 할 수가 없
습니다. 이 저헌가는 휼륭하면서도 눈물이 나도록 아름답게 도덕적 의무를 충실히 대를 이여서 이행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수백년동안 정수기에서 정수된 물을 뽑아내듯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양
반은 연안이씨이다". 이렿게 지속적으로 불리어 온 것입니다.
오늘날 지폐에 위인으로 나오는 인물이 나왔다고 반드시 그집안을 명문이라 하지 않습니다.
..............눈물나게.............
2004-11-19 오전 11:51:00
향객
관료가문 가운데 학풍에 바탕한 명문이라하겠지요. 조선의 선비정신
을 대표했다기엔 다소 어색한 면이 있군요. 조선의 선비 정신을 대표했
다랄테면, 전국의 유림의 추앙을 바탕으로 대대로 관료보다는 처사를
많이 낸 유반이어야 할 것입니다. 조선에서 거대학 유림촌을 형성했던
안동, 준재가 많기로 유명한 논산 등의 명문이 그런 예이겠지요.
진성이씨 퇴계 가문, 의성김씨 학봉 가문 등 대표적인 영남학파 가계
나 광산김씨 사계-신독재가문, 은진송씨 우암-동춘당 가문 등 대표
적인 기호학파 가계 등을 말입니다. 2004-11-21 오후 3:59:00
향객
이들 가문의 족보를 읽어보면 대대로 선비가 끊이지 않았고, 공히 학행
으로 천거되고, 관직에 등용된 경우가 수두룩 하지만 그러한 벼슬을 사
양, 취임하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임을 알수있습니다.
'8강', '16강' 등으로 선정되어있는 관료, 세도가문 만큼 벼슬을 못한
것을 두고 가문의 문지를 논할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2004-11-21 오후 4:05:00
향객
그런 연유에서 조선의 기반인 유학의 명문가로
진성이씨 퇴계가문, 광산김씨 사계가문, 은진송씨 우암가문,
의성김씨 학봉가문, 풍산유씨 서애가문을 5대 명문이라 봅니다. 2004-11-21 오후 4:06:00
나그네
님 말씀처럼 학행으로 천거되어도 벼슬에 나아가지 안했다면
그분들의 뜻과는 반대로 족보나 비문등에 대표직함으로 적어 놓고
선비이면서 세도를 부릴대로 부려 그 지방 토지나 임야들은 지금도
그 집안들의 사유지가 되었지요
처사행세를 하려면 남명 조식같이 벼슬길에도 나아가지 않고 청빈한 생활을 해야지
요 2004-11-21 오후 4:48:00
덕천
공인된 자료를 내놓고 설명을 하야 이해가 되지요
밑에 운영자님이 저희 가문에 대해 좋은 글을 써주었기에 보충글을 쓴것 뿐입니다
글들을 잘못이해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난 기본적으로 관직보다는 흉년이 들면 땅을 더 사지말고 백리안에 굶어죽는 사람
이 없게 하라고 이르신 경주 최부잣집 같은 가문을 명가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2004-11-21 오후 9:15:00
향객
나그네,선비님께/
위에 제가 언급한 가문들은,선조의 덕으로 학자라 할 수도 없는 자들
이 문인행세를 하던 그런류의 평가로 절하될 수 없는 명문 집안들 입니
다. 위에 열거한 가문들은 대대로 선비가 끊이질 않았던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세도가문이나 선비가문이 서로 성격이 다게 번성을 해왔을
것입니다. 다만, "선비정신을 대표한다"고 하기에 관료집안 보다는 성
리학의 대가를 배출하고 후손 대대로 학자를 배출해 온 가문이 더 적합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지요.
나그네 님이나 선비님의 답글대로라면 "학문적 성과도 없는 이를 학자
라고"하는 집안과 비교될 것은 연안이씨 같은 명문이 아니라 간신을 많
이 배출한 그런 유의 집안과 비교해야 겠지요.
위의 명문들은 나그네님과 선비님이 말하는 그런 가문들이 아닙니다. 2004-11-21 오후 9:50:00
삐침이
고집스런 선비정신을 연리에서 찾는다는 사람은 새삼 처음 보겠습니다. 진짜 선비정신을 구현한 집안
을 함 찾아보시지요? 어느 누가 연리집안이 선비정신을 구현한다거나 표현한다고 말합디까?
글쓰신 분의 글은 미적인 표현이 가미된 좋은 글입니다. 하지만 연리가 선비정신을 표현한다거나 대표
한다고는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2004-12-02 오전 11:55:00
공감
삐침이 님의 의견에 어느정도 공감합니다. 연안이씨는 벼슬아치를 다수 배
출한 명문가이지만, 선비정신을 대표한다고 한다면 어불성설이지요. 2004-12-06 오후 6:32:00
德泉
비판만 하지 말고 유명한 선비가문 직계 후손들의 행적을 이야기하여
우리가 또 다른 선비가문의 대대로 이어온 선비정신을 보고 듣고 배우면 더 좋겠지요
자기 가문이나 잘 아시는 가문의 대대로 이어져 온 좋은 전통을 소개 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2004-12-07 오전 7:22:00
남기남
덕천님이 말씀하신 것은 연안이씨는 물들지 않았고 다른 성씨들은 물들었다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
니다. 예를 들어 청백리가 연안이씨 님의 자료에서 7명이라고 하였지만, 청백리를 다루는 어떠한 서
적에서 그렇게 소개를 한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의 서적이 아닌 고서적에서 말이지
요. 저도 1700년대에 정리된 청백리록을 소장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더구나 연안이씨가 7명으로 청백리를 배출하였다고 과신하고 있지만 몇몇 씨족에서만 사서에 기록
되고 청백리록에 오른 것을 종합해볼때 7명을 상회하는 씨족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모든 면에서 연안이씨가 최고라고 하는 생각은 조금 깨치심이 좋을 듯 합니다.
2004-12-31 오전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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