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민족

호암의 5대 결단이 오늘의 삼성을 일군 힘

솔도미 2011. 9. 13. 21:52

호암의 5대 결단이 오늘의 삼성을 일군 힘
기사입력 2010.01.11 04:00:05 | 최종수정 2010.01.11 07:23:4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 경영의 神들에게 배우는 기업가 정신 ◆ ① 이병철 삼성 창업주

1934년 10월 어느 날 청년 이병철은 밤늦게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자녀들이 곤히 잠든 모습을 봤다. 문득 `세월을 너무 헛되게 보냈다`는 생각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날 밤 뜬눈으로 지새면서 독립운동과 관료, 사업 가운데 어느 쪽으로 진로를 정할까 고민하다 결국 사업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었다. 독립운동 못지않게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며칠 후 부친께 이 결심을 얘기했더니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고 승낙했다. 시장조사 끝에 정미소를 시작하기로 하고, 1936년 지인 2명과 함께 1만원(圓)씩 출자해 공동으로 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설립했다. 그 후 마산에는 상품을 운송할 수단이 크게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해 `마산일출자동차회사`를 인수해 트럭만 20대를 보유한 자산가가 됐다. 하지만 그는 대규모 토지 매입 사업에서 큰 실패를 봤다. 절치부심 끝에 1938년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무역업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삼성상회는 현재 삼성그룹 모태가 됐다.

◆ 상업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

=이병철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수입품을 들여다 파는 무역업이 외화 낭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입품을 대체할 제조업에 뛰어들겠다는 뜻을 밝히자 주위에서는 `전쟁통에 무슨 공장 설립이냐. 수입해서 파는 편이 안전하고 이익이 더 난다`며 말렸다. 그렇지만 이병철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53년 순수 한국인 손으로 공장을 지어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CJ 전신인 제일제당을 설립한 것이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그때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들이 활기차게 일에 몰두한다. 기업가에게는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당시 사람들은 제일제당으로 돈을 많이 번 이병철을 `돈병철`로 불렀지만 그에게 투자 동기가 됐던 것은 돈이 아니라 성취감와 국가경제에 기여한다는 사명감이었다.

그는 제일제당을 통해 수입대체 산업이라는 장르를 열었다. 무역업을 하던 상업자본가에서 산업자본가로 변신한 것이다. 이어 1954년에는 당시 수입의존도 80%인 모직을 국산화하기 위해 대구에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공장을 자력으로 짓겠다고 하자 미국 유명 모직기계 업체인 파이팅 임원은 새가 날개를 퍼덕이는 시늉을 하며 "한국인이 자력으로 건립한 공장에서 3년 이내에 제대로 된 제품이 생산된다면 하늘을 날겠다"고 비아냥거렸다.

`다윗`에 비견된 제일모직은 400년 전통을 지닌 `골리앗` 영국 모직업체들을 보란 듯이 물리쳤다. 그는 실패해도 계속 도전하는 불굴의 헝그리 정신으로 삼성 사업영역을 하나 둘씩 넓혀 나갔다.

◆ 중화학공업ㆍ첨단산업 개척

="삼성 업종 구성을 개편하라."

1972년 말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비서실에 중화학공업 비중을 높이라는 특명을 내렸다. 비서실은 1972년 삼성그룹 전체 수출액에서 15.7%에 불과한 중화학 부문 비중을 1977년까지 37.4%로 높인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1974년 삼성석유화학과 삼성중공업이 세워졌으며, 그 뒤 삼성조선과 삼성정밀 등이 차례로 설립됐다. 일본 산요전기에서 기술을 들여온 삼성전자는 1977년부터 일본 측 지분을 모두 넘겨 받아 독자적인 브랜드를 내걸고 글로벌시장 개척에 나서게 된다.

"대용량 메모리 반도체인 VLSI(초대규모 집적회로) 사업에 투자한다."

이병철 회장은 1983년 2월 도쿄에서 대규모 반도체에 투자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대용량 메모리 반도체 사업 진출을 3월 15일을 기해 공표해 달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도박`이라며 말렸으나 그의 기업가 정신을 꺾지 못했다. 1987년 11월 세상을 뜨기 전 그가 참석한 마지막 공식행사도 그해 8월에 있은 경기도 기흥 반도체 3라인 착공식이었다.

◆ 탁월한 CEO인 3남 발탁

="창업보다 수성(守成)."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이미 이룩해 놓은 사업을 지켜 간다는 것은 그 이상 어렵다"고 적고 있다. 오랜 고민 끝에 이 회장은 승계자로 3남인 이건희를 택했다. 어릴 적부터 유교 교육을 받아 `논어`를 바이블처럼 여긴 그가 장남이 아닌 3남을 후계자로 택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의 결정이 탁월했다는 건 수치가 증명해준다. 1987년 이병철 회장이 작고하고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취임할 당시 삼성그룹 매출은 17조3900억원, 순이익은 2060억원이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 취임 21년째인 2008년 매출은 11배 늘어난 191조1000억원, 순이익은 43배 늘어난 11조7000억원을 기록했다.

◆ 이병철 어록

▶개인이 사용 가능한 범위를 넘으면 이미 부는 내 것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1971. 2. 사장단회의에서)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事業報國)에 있다는 신념에도 흔들림이 없다. (1976. 11. 전경련회보)

▶모든 설비 투자 계획에 있어서 10년 이상 50년 정도 장기 안목 위에서 세워야 한다. (1977. 6. 삼성조선 건설현장에서)

▶`삼성은 인재의 보고`라는 말을 세간에서 자주 하는데 나에게 있어서 이 이상 즐거운 일은 없다.

(1982. 4. 보스턴대학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기념강연에서)

▶호황 때는 불황 때를 대비하고, 불황 때는 호황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1983. 9. 사장단회의에서)

▶기술은 국력이며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1986. 6. 삼성종합기술원 기공식에서)

▶인간사회 최고의 미덕은 봉사라고 생각한다. (1987. 1. 매일경제신문 기고문에서)

[김대영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