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헌 이석형 묘 및 신도비(경기 기념물 171호) written by www.touralon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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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선생의 묘 소개시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좌측에 위치한 정몽주 선생의 묘를 둘러 보는 동안에 풍수하시는 분들은 이석형 선생의 묘역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서(위 사진) 풍수에 관해서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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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 이씨(延安 李氏) 비각 공원(碑閣 公苑) 전경 |
정몽주 선생의 묘 소개시에는 묘역 입구 좌측에 포은의 신도비만 있다는 것을 알려 드렸습니다만, 우측에는 연안 이씨 비각 공원(위 사진)이 있습니다. 앞에서 보면 나란히 줄지어 세워져 있는 비각들이 대단한 집안임을 증명해 보이는 듯 합니다. 저헌의 신도비는 비각군 뒤편 중앙 비각 안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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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형 선생의 신도비각과 주변 전경 |
저헌 선생의 신도비는 다른 신도비와는 달리 크고 웅장하지도 않으며, 신도비에 이수도 없습니다. 단지, 다른 점은 비신 전체에 물결 무늬(?)가 있으며, 그로 인해서 글씨가 마모된 것은 아니나 식별이 어렵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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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형 선생의 신도비 |
풍수하시는 분들이 이렇게 저헌 선생의 무덤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선생의 후손들이 8정승, 6대제학, 42판서가 배출되었고, 대한민국에 들어와서도 2명의 장관과 1명의 차관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석형 선생의 묘역 다음으로 정몽주 선생의 묘역으로 가겠지 했으나 바로 뒤편 안쪽에 있는 저헌의 선조 묘로 향하더군요. 저헌의 묘도 풍수상으로 중요하지만 저헌의 선조들 묘도 함께 풍수를 봐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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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형 선생의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전경 |
▲ 이석형 선생의 묘역에서는 풍수 강의가 한창... |
포은의 묘역에 비하면 저헌의 묘역은 아주 단촐합니다. 봉분 앞에 있는 상석과 향로석은 근래에 조성된 것 이고, 포은의 묘비와 같이 저헌의 묘비도 서쪽 방향의 측면으로 세워져 있으며, 좌우로는 문인석이 한 쌍 서 있을 뿐입니다. 연안 이씨의 시조 무(茂)는 당나라의 장군으로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평정한 다음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황해도 연안 지방에 자리잡고 가문을 일으켰으며, 저헌은 세종 때 진사 생원 문과 등 삼장(三場)을 장원했고, 문신중시(文臣重試)에서도 장원을 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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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형 선생의 묘 |
▲ 이석형 선생의 묘비 |
※ 하기의 내용도 인터넷에서 풍수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였으며, 앞서 소개한 포은의 묘와 저헌의 묘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내용이 비슷하지만 다시 소개합니다. 이석형의 묘에 합부된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정몽주선생의 증손녀로 이석형은 정몽주 선생의 증손서이다.연일정씨가 이석형과 혼인한 후에도 남편 이석형은 벼슬살이 하느라고 한양에 가 있었지만 부인은 그냥 향촌인 이 곳 문수산 아래 살고 있었다. 지관을 들여 문수산 일대를 둘러 본 결과 가운데 2개 날등 중에서 오른 쪽이 아주 명당이라는 언질을 받아 장차 이석형의 묘자리로 점 찍어 놓았다. 그런데 나라에서 정몽주의 묘를 이장 할 곳을 바로 문수산으로 정하고 다음날 지관이 묘 터를 보러 온다는 전갈이 왔다. 연일정씨는 밤중에 산아래 천수답에 물을 대는 물웅덩이에서 물동이로 물을 퍼 날라 오른쪽 날등에 갖다 붇기를 밤새도록 하였다. 다음날 조정에서 보낸 지관이 먼 앞산에서 문수산을 바라보고 가운데 두 날등이 다 괜찮은데 오른쪽 날등이 아주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현장으로 갔다. 현장에 도착한 지관은 오른쪽 날등이 축축하게 물이 나고 있는 것을 보고 ‘아! 아깝다. 이 좋은 자리에 물이 나니 묘자리로는 안되겠다’ 하면서 왼쪽 날등으로 결정하고 돌아가 정몽주 묘는 왼쪽 날등에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석형이 죽은 후 오른쪽 날등에다 묘를 썼다. 이석형의 후손은 아주 번창하였다. 그 후손 중에는 ① 8정승(八政丞: 인조6년 李廷龜, 효종원년 李時白, 영조28년 李天輔,
영조34년 李후, 정조6년 李福源, ② 삼대 대제학(三代 大提學)을 비록하여
대제학 6인(선조34년 李廷龜, 인조9년 李明漢, 효종10년 李一相 삼대 대제학, 영조37년 李鼎輔, 영조48년 李福源, 순조1년 李晩秀
2대대제학), ③ 조선조 대표적인 문장가 월상계택(月象鷄澤: 月沙 李廷龜, 象村 申欽, 鷄谷 張維, 澤堂 李植)의 월사 ④ 인조반정을 주모하여 성공으로 이끈 정사공신(靖社功臣)
삼부자(三父子: 부 李貴 1등 延平府院君, 장자 李時白 2등 延陽府院君, 3자 李時昉 2등 延城君), ⑤ 육조(六曹) 판서(判書 : 正二品)
37인, ⑥ 2대 3부원군(府院君), 9대 11인의 봉군(封君:1대 李貴 延平府院君, 2대 李時白 延陽府院君, 李時聃 延豊 府院君, 李時昉 延城君, 3대 李炘 延昌君, 4대 李相胃 延城君, 5대 李泳 延恩君, 6대 李明熙 延原君, 7대 李瑜 延陵君, 8대 李度陽 延川君, 9대 李押 延豊君) 등을 배출하는 반면 한 사람의 역신이나 탐관오리가 나오지 않았고, 청백리(淸白吏)와 충효절열(忠孝節烈)이 줄을 이어 나왔다. 이렇게 후손이 융성한 것이 이석형의 묘자리 때문이라 것이 현대 과학적인 사고로는 허무맹랑한 것이겠 지만 옛날 풍수지리설을 믿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왔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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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형선생 묘역의 문인석 모습 |
조선 전기의 문신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1415∼1477) 선생의 묘소이다. 세종 23년(1441)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14년간 집현전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다. 세조 2년(1456) 사육신 사건을 전해 듣고 그들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동헌에 남겼는데, 다른 관리들이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조가 막아주었다. 그후에도 세조의 총애를 받아 황해도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성종대에는 손성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로는『대학연의』,『대학연의집략』,『저헌집』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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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이석형선생 묘역 안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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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이석형선생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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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 3 빨간 깃발이 있는 곳에 정몽주선생 묘와 이석형 선생의 묘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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