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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반도체 결단’ 비화

솔도미 2011. 9. 13. 22:01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 ‘반도체 결단’ 비화

<이코노미플러스>는 지난 1월호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호암 이병철 회장(1910.2.12~1987.11.19)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그의 기업가 정신을 되돌아봤다. 호암이 타계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다. 특히 오늘날 세계 일류로 부상한 한국 반도체 산업은 호암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호암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반도체 산업 진출과 육성. 이번 호에서는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되짚어본다.

일본 산업 구조조정서 ‘힌트’ ‘반도체 입국’ 야망 품다
세계 경제 대전환 흐름 읽고 첨단기술 분야 육성 결심해
치밀한 조사·숙고 끝 진출 선언…미·일 추격 발판 다져

“삼성이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한 것도 충분한 투자 여력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오로지 반도체 산업을 성공시켜야만 한국의 첨단산업을 꽃 피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삼성의 모든 가용자원을 총동원하여 이 사업의 추진을 결심했던 것이다.”(1984년 5월17일. 삼성반도체통신 기흥 VLSI 공장 준공식에서)
이병철 회장은 가슴 깊숙한 데서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꼈다. 세상 사람들은 삼성의 반도체 사업을 무모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과감하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였고, 기어코 국내 최초의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반도체 공장을 세우고야 말았다. 당시 세계 반도체 산업을 양분하고 있던 미국과 일본도 삼성의 반도체 도전에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삼성이 머지않아 자신들을 추월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2월 삼성은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리던 한국반도체의 지분 50%를 인수했다. 한국반도체는 당시 국내 유수의 오퍼상이었던 켐코(KEMCO)가 기술집약적인 웨이퍼 가공생산을 위해 세운 업체였다. 한국반도체 지분 인수 과정에는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 이사가 개인자금을 들일 만큼 깊이 관여했다.
하지만 삼성그룹 내부에서는 반도체 사업에 회의적인 분위기였다. 그룹의 중추인 비서실에서도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내린 터였다. 경제기획원·재무부·상공부 등 경제 관련 부처들도 “투자 과잉에다 기술자가 없다”며 말렸다. 더욱이 삼성전기·삼성전관 등 여타 전자 사업이 고전하고 있을 때여서 그룹 차원의 투자 여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건희 당시 이사는 왜 반도체에 집착했을까.
그 무렵 삼성물산 도쿄지점장이었던 이길현 전 신라호텔 사장은 <삼성 60년사>에서 “당시 이건희 이사는 이미 ‘반도체 공부’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마쓰시타·도시바·NEC 등 일본 전자업체 기술자들을 자주 만났고, 단독 세계여행을 통해 반도체 관련 인사들을 만나며 자료를 모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삼성은 전자손목시계용 칩, 전자오븐용 칩, 트랜지스터 등의 개발에 잇달아 성공했지만 사업은 순조롭지 못했다. 계속 적자를 내다가 결국 자본금 잠식 상태에 이른다. 삼성은 나머지 지분 50%마저 인수했다. 회사 이름도 삼성반도체로 바꿨다. 1978년 3월의 일이다. 이듬해에는 당시 국내 반도체조립 업계 선두업체였던 페어차일드가 노사분규 때문에 부천 공장을 매물로 내놓자 이를 인수했다. 웨이퍼 가공에서 조립생산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일관생산 체제가 갖춰진 것이다.
그럼에도 반도체 사업의 경영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979년 9월 어느 날 당시 삼성전자 김광호 이사(전 삼성전자 부회장)는 강진구 사장(전 삼성전자 회장)의 전화 호출을 받았다. 사장실로 갔더니 정작 강 사장은 자리에 없었다. 이병철 회장을 만나러 급히 나갔다는 게 비서의 설명이었다. 그 시각 강진구 사장은 이병철 회장에게 “김광호 이사를 반도체로 보내겠다”는 보고를 하고 있었다. 일전에 이 회장으로부터 “삼성전자에서 가장 추진력이 강한 사람을 반도체로 보내라”는 특별지시를 받은 데 따른 후속 인사였다. 정작 김광호 이사는 강진구 사장에게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터였다.

70년대까지 반도체 사업은 ‘아오지 탄광’

김광호 전 부회장의 회고다. “삼성반도체 반도체사업부장으로 발령이 나서 갔더니 직원 천여 명이 할 일이 없어 풀을 뽑고 있더군요. 한심하기 짝이 없었지요. 당시 반도체는 삼성 내에서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회사였습니다. ‘아오지 탄광’으로 불릴 정도였지요. 어쨌든 제가 간 이후에도 적자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보고를 올렸지요. 그래서 결국 삼성반도체는 1980년 삼성전자로 합병됐다가 1982년 또 다시 한국전자통신으로 합병돼 삼성반도체통신으로 거듭났습니다.”
삼성반도체통신 출범 과정에는 사명(社名)에 얽힌 에피소드도 있다. 김광호 당시 상무(1980년 7월1일 상무 승진. 정기인사 시즌이 아닌 매우 이례적인 인사였다)는 신설 합병법인의 상호를 ‘삼성통신반도체주식회사’로 기안해 보고했다. 그랬더니 이병철 회장은 대뜸 “택도 없는 소리 마라. 삼성반도체통신으로 해라!”는 것이 아닌가. 잠깐 당혹스러웠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해가 됐다.
김 전 부회장의 설명이다. “저는 삼성반도체가 적자 기업인 데다 흡수당하는 형편임을 감안해 의당 회사 이름을 그렇게 기안했던 것인데 회장님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지요. 그때 이미 회장님의 향후 반도체 사업 구상은 상당히 깊이 진척돼 있었던 겁니다.”
그랬다. 이병철 회장은 그 무렵을 전후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화두로 장고를 거듭하고 있었다. 1980년 봄 어느 날,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일본인 이나바 박사가 도쿄에 체류 중이던 이병철 회장을 방문했다. 이나바 박사는 과거 일본 정부에서 경제 정책을 다룬 경력이 있는 경제 전문가였다. 그는 일본 산업계의 거대한 방향 전환을 들려주었다.
요지는 이러했다. “제철·조선·석유화학·섬유 등 일본 기간산업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기술과 품질을 향상시켰지만 과당경쟁·과잉생산 때문에 도산이 속출해 그 부담이 고스란히 국가와 국민에게 돌아갔다. 대외적으로는 덤핑 수출로 무역마찰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기간산업의 생산 규모를 20~50%가량 대폭 억제하기로 했다. 대신 반도체·컴퓨터·신소재·광통신·유전공학 등 고부가가치의 첨단기술 분야로 전환을 도모하고 있으며, 특히 반도체와 그 주변의 기계공업에 치중하고 있다. 그 결과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고 외화 수입도 급증했다. 일본의 살 길은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첨단기술산업에 달려 있다.”
이병철 회장은 이나바 박사와의 만남에서 감명을 받았다. 자원이 없어 무역입국 외에는 달리 국가의 활로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도 하루빨리 첨단기술산업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왔음을 직감했다.
이 회장은 당시 심경을 <호암자전>에 이렇게 남겼다. “삼성은 새 사업을 선택할 때 항상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利害)가 어떻게 되느냐, 또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등이다. 이 기준에 견주어 현 단계의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 혁신의 핵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은 당시로선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세계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을 추격할 수 있을까, 막대한 투자 리스크는 감당해낼 수 있을까, 또 고도의 전문 기술 인력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난제가 수두룩했다.
이병철 회장은 특유의 치밀한 자료 조사와 폭넓은 정세 판단에 나섰다. 미국·일본은 물론 국내 전문가들을 수도 없이 만났고, 반도체에 관한 한 최고의 자료들을 섭렵해 나갔다. 물론 만류하는 전문가들도 적지 않았다. 일본 도호쿠대학의 덴다 박사는 “메모리 반도체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삼성이 하기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그는 당시 파워 트랜지스터 분야의 손꼽히는 석학이었다.

몇 년의 장고 끝에 마침내 ‘도쿄선언’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생애 내내 남들이 하지 않는 사업, 남들이 말리는 사업에 도전해 결실을 맺어온 기업가였다. 칠순을 훌쩍 넘긴 고령이었지만 그 도전정신은 전혀 퇴색함이 없었다. 오랜 숙고 끝에 반도체 사업이 전혀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가 1982년 5월 무렵이었다. 그 몇 달 뒤인 10월 반도체·컴퓨터 사업팀이 꾸려졌다. 이 팀은 당시까지 개발된 반도체들의 성능·원가·시장동향 등을 조사하는 한편 장·단기 사업계획을 세워 이 회장에게 수시로 보고했다.
1983년 3월15일 아침 일본 도쿄. 이병철 회장은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오늘을 기해 삼성은 VLSI 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 오랜 고뇌 끝에 나온 그의 한마디는 곧바로 세상에 공표됐다. 반도체 입국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된 이른바 ‘도쿄선언’이다.
그러나 첫걸음을 뗐을 뿐, 갈 길은 너무 멀었다. 속도를 내야만 했다. 가장 큰 과제는 기술 확보였다. 당시 미국과 일본 반도체 업계가 매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기술보호주의가 득세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다른 업체에 대한 기술제공을 매우 꺼리는 분위기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삼성은 어렵사리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일본의 샤프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샤프의 기술제공은 일본 업계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샤프는 심지어 “국익을 해치는 나라의 적”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일단 기술도입이 성사됐지만, 마냥 외국 업체에 기술을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술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일류업체로 나아가는 것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재미 한국인 과학자들에게 선이 닿았다.
김광호 전 부회장의 말이다. “당시 미국 반도체 업계에는 한국인 과학자들이 제법 많았어요. 반도체 연구개발이 워낙 힘든 일인지라 미국인들은 그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습니다. 말하자면 의대생들이 ‘외과’를 기피하는 것과 비슷한 거죠. 그 틈새를 바로 한국인이나 중국인 등 유학파 학자들이 채우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당시 반도체 인재들을 ‘꼬시러’ 수없이 미국 출장을 다녔습니다. 한꺼번에 모아 놓고 면담할 수 없어 어떤 때는 한 사람을 만나러 비행기를 탔다가 다음날 귀국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해서 삼성 반도체 사업을 짊어질 역사적인 ‘선발대’가 조직된다. 처음 삼성이 접촉한 유학파 과학자는 이임성·이상준·이일복 박사 3인이었다. 이들 모두는 삼성의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했다. 조국의 첨단산업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반도체 사업은 몇몇 인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꽤 많은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이임성 박사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안했다. 미국에 현지법인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과학자들을 영입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최신기술 입수와 수출 전진기지 확보에도 이점이 있었다.
198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실리콘밸리에 현지법인 SSTI4(Samsung Semiconductor & Telecommunications International Inc.)가 문을 열었다. SSTI는 국내의 미숙련 인력들이 파견돼 교육·훈련을 받고 전문가로 거듭나는 인재사관학교 구실도 했다. 1기 연수생 중에서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의 리더로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조수인 메모리담당 사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SSTI는 1985년 SSI로 이름을 바꿨다. SSI는 이후에도 기술인력 양성과 첨단기술 개발에 많은 기여를 했다.

생애 마지막 도전에 남은 열정 ‘올인’

이병철 회장은 1983년 도쿄선언 이후 반도체 사업에 엄청나게 몰입했다. 한 달에 두세 차례씩 ‘반도체회의’를 소집했다. 반도체회의에는 과장급 직원까지 참석했다. 전사적인 총력전 체제를 가동한 것이다. 이 회장은 공장에도 수시로 내려가 현황을 점검했다. 기업가 생애의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해 12월12일 삼성반도체통신 강진구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64K D램의 생산·조립·검사까지 완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미국·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떨어졌던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을 2~3년 차이로 좁힐 수 있게 됐습니다.”
국가적 쾌거였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삼성의 엄청난 반도체 개발 속도에 충격을 받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존의 낡은 부천공장 생산라인을 활용해 VLSI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삼성은 그 후 불과 10개월 만인 1984년 10월 256K D램 개발에도 성공했다. 이어 1986년 7월에는 1메가 D램을 개발, 한국 반도체 산업을 ‘메가 시대’에 진입시켰다. 마침내 1987년에는 세계 반도체 업계 톱 10(9위)에 오르는 경사를 맞았다.
이처럼 반도체 사업은 빛나는 성과를 이어갔지만 적자에서는 좀체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 10위 안에 우뚝 선 1987년에도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13년 연속 적자였다. 적자 규모도 상당히 컸다. 이러다 보니 세간에서는 “삼성이 반도체에 매달리다 망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렸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실적이 부진하면 임직원들을 닦달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들을 안심시키고 독려했다. 김광호 전 부회장의 회고다. “회장님은 언젠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도체사업본부장 아이가! 김군, 니는 적자 걱정 말고 기술자 양성과 신기술·신제품 개발에만 매진해라. 내가 책임질 테니.’ 저는 그 말씀 한마디가 오늘의 반도체 신화를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두가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면 됐으니까요. 평소 회장님은 적자에 대해 엄격했지만 유독 반도체 사업만큼은 달랐습니다.”
이병철 회장이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7년 8월 기흥 반도체 공장 3라인 기공식이 마지막이었다. 기흥 3라인은 이듬해 준공식을 갖자마자 바로 풀가동에 들어갔다. 1988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첫 흑자를 냈다. 흑자 규모는 그 동안의 누적 적자를 모두 만회하고도 남았다.
이병철 회장은 생애 마지막 사업에서 이익을 보지는 못했다. 아니, 애당초 단기적인 이익을 욕심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삼성의 미래, 나아가 국가 경제의 앞날을 열어갈 든든한 열쇠 꾸러미를 남기는 게 그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글: 김윤현 기자 (uny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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