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100년, 발자취를 따라가다
[중앙일보]2010.02.02 00:31 입력 / 2010.02.02 03:3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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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이병철 회장 1910. 2. 12 ~ 1987. 11.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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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1910년 2월 12일) 삼성 창업자인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태어났다. 그는 늘 도전했고 개척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내저을 때 사업을 시작해 일으켰다. 제당과 모직, 석유화학과 조선, 전자와 반도체 등 그가 일군 사업이 대부분 그랬다. 호암은 자신의 전부를 사업에 건 사람이었다. 사업으로 나라에 봉사하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이 신념이었다. 그는 “기업은 사람이고 국가도 사람”이라고 믿고 실천했던 기업가였다. 그가 세운 삼성은 그의 후계자 이건희 회장 시대에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피어났다. 제일모직·삼성전자·삼성종합기술원을 찾아 그의 기업가 정신을 살펴봤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구 56년 제일모직 공장보다 기숙사 먼저 완공 박정희 “이 정도면 딸 맡길 수 있겠군”
① 복도에 깔린 것은 고급스러운 회나무였다. 스팀 난방이 설치된 6인실 다다미방은 따뜻해 보였다. 대형 목욕탕과 세탁실은 지금 쓰기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바깥에는 히말라야시다·은행나무·참나무·라일락 등이 적당한 간격으로 안정감 있게 서 있었다. 외벽엔 수십 년 된 담쟁이덩굴이 가득했다.
대구시 북구 침산동 105-70번지. 제일제당과 함께 삼성그룹의 뿌리가 된 제일모직 대구공장 터를 지난달 28일 찾았다. 쉴 새 없이 돌아가던 공장들은 곳곳으로 옮겨지고 없었다. 부지 한쪽엔 고층아파트가 빼곡했다. 역사를 간직한 곳은 정문 옆 여자 기숙사 6개 동이었다. 기숙사는 2년 전까지 삼성전자 서비스직원 교육장으로 쓰였다. 50년이 넘어도 사용할 수 있는 사원 기숙사, 그것은 호암의 경영관을 알 수 있는 단초였다.
호암은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한 뒤 공장과 여공 기숙사를 동시에 짓기 시작했다. 미용실과 도서실까지 갖춘 기숙사는 당시 서울의 이화여자대학교 기숙사에 비견됐다. 호암은 주변 조경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연못과 분수를 만들었다. 온실에선 꽃을 가꿔 화분을 수시로 공장 안으로 실어 날랐다. 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곳을 방문해 “이 정도면 딸을 맡길 수 있겠군”이라고 말했다.
제일모직은 ‘무(無)’에서 시작된 도전이었다. 자본도, 기술도, 땅도 없었다. 호암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계획했다. 처음부터 국제 경쟁을 내다보고 최신·최고·최대 규모로 짰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업 착수에서 시판까지 기간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호암은 공장 건립과 기술 습득을 동시에 진행했다. 공장 착공도 하기 전 서울대 공대 출신 기술자 3명을 선발해 서독으로 기술 연수를 보냈다. 서독 전역의 한국인이 20명 안팎일 때였다. 그 와중에 공장보다 먼저 최상급 사원 기숙사를 완공(56년)한 기업인, 그가 호암이었다. 그는 “종업원을 가족적으로 대우하고자 했기 때문” “쾌적한 환경 속에서 일하면 작업능률도 반드시 향상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자서전 ‘호암 자전’에서). 호암은 최고의 대우가 최고의 제품을 낳는다는 이치를 꿰뚫어 봤다. ‘인재제일’은 그의 신조였다. 제일모직은 금세 동급 품질에 5분의 1 가격의 양복지를 생산해 영국제 양복지를 시장에서 밀어냈다.
호암은 사람을 뽑고 쓰는 일을 중하게 여겼다. 그는 “내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기르고 육성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대졸자 신규 채용 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면접에 참여했다. 어쩌다 공장에 채용을 부탁할 때는 능력 미달이면 절대 뽑지 말라는 단서를 달았고, 그 다음엔 당락 여부를 일절 묻지 않았다. 호암이 당시 공장장에게 한 지시가 의미심장하다. “그 자리에 있으면 관에서 채용 부탁이 많을 기다. 능력 모자라는 사람은 돈으로 때우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받으면 안 된데이”(60년대 제일모직 공장장을 지낸 조필제(85) 세양주택 회장의 회고).
대구=이상렬 기자
수원 69년 산요와 제휴 ‘전자’ 뛰어들어 “공단은 산요보다 1평이라도 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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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0월 25일 삼성전자를 시찰하러 온 재계 중진들을 맞아 호암이 회사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
| 1982년 10월 25일 삼성전자를 시찰하러 온 재계 중진들을 맞아 호암이 회사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
| ② 100년 전(1910년 2월 12일) 삼성 창업자인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태어났다. 그는 늘 도전했고 개척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내저을 때 사업을 시작해 일으켰다. 제당과 모직, 석유화학과 조선, 전자와 반도체 등 그가 일군 사업이 대부분 그랬다. 호암은 자신의 전부를 사업에 건 사람이었다. 사업으로 나라에 봉사하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이 신념이었다. 그는 “기업은 사람이고 국가도 사람”이라고 믿고 실천했던 기업가였다. 그가 세운 삼성은 그의 후계자 이건희 회장 시대에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피어났다. 제일모직·삼성전자·삼성종합기술원을 찾아 그의 기업가 정신을 살펴봤다.
삼성전자 수원 사업장이 있는 경기도 수원시 매탄동 416번지. 과거 백색가전 단지로 유명하던 이곳은 2001년 정보통신연구소, 2005년 디지털미디어연구소가 들어서면서 삼성전자의 연구개발 메카로 탈바꿈했다. 1979년 입사해 지난해 현역에서 물러난 허영호 고문은 “입사 초기만 해도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 다녀야 했던 군대 막사 같은 사무실이 상전벽해를 여러 번 했다”고 소개했다. 지난달 26일 찾은 이곳은 호암이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어느새 아름드리로 자라 그 세월을 대변하고 있었다.
호암은 69년 신수종 사업으로 전자사업을 선택했다. 당시 국내 전자업계는 라디오·TV·전화교환기를 만들어 내수시장에 집중하는 구조였다. 삼성의 진출에 업계의 반대가 극심했다. 결국 ‘수출에 전념한다’는 조건으로 출사표를 내야 했다.
호암은 ▶전자제품 대중화 ▶기술 독립 ▶전략적 대외 수출을 동시에 추진했다. 이를 위해 일본 산요·NEC, 미국 코닝글라스 등과 손을 잡았고 매탄동에 45만 평(149만㎡) 부지를 사들였다. “도쿄의 산요 단지가 40만 평(132만㎡)이다. 이보다 단 한 평이라도 넓어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호암은 이곳에 삼성전기·삼성SDI·삼성코닝 등 4개 계열사를 입주시켰다. 부품과 완제품 회사 간 연구개발·생산·물류에서 시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시도였다. 김광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공장 배치”로 “이들은 치열한 경쟁과 공동 연구를 통해 각각 세계적인 전자부품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 가운데 호암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곳은 어디일까. 허 고문은 “호암은 VCR 라인에 특별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고 답했다. 기술보국에 대한 그의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어서다. 79년 삼성전자는 한국 최초, 세계 네 번째로 VCR을 개발했다. 당시만 해도 VCR은 최첨단 전자제품이었다.
이때 실무를 주도했던 이가 윤종용 삼성전자 고문이다. 윤 고문(당시 상무)은 “일본 JVC로부터 표준 인증을 받기 위해 영하 10도를 오가는 매서운 날씨 속에 연구원들과 밤을 새운 것이 부지기수였다”며 “이때 스트레스로 원형탈모증을 앓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84년 삼성은 독자 기술로 VCR을 생산했다.
호암은 “윤(종용)군, 굿이다”라며 새 VCR 생산라인을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지금은 연구개발센터로 바뀌었지만, 이 VCR 공장은 87년 11월 호암 장례식 때 용인 선산으로 떠나던 운구차가 그 주위를 한 바퀴 돌고 갔을 만큼 그의 애정이 묻어 있다.
삼성이 매탄동에 자리 잡은 지 41년. 삼성전자는 지난해 117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면서 지멘스·휼렛패커드를 제치고 세계 1위의 전자업체로 부상했다.
수원=이상재 기자
기흥 86년 반도체 적자 1300억일 때 2800억 들여 “제3 라인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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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제6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호암. |
| ③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매미산 기슭에 자리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43만 평(약 142만㎡) 부지 한가운데 서있는 무한탐구상(像) 주변을 캐주얼 차림의 연구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분위기만 봐서는 거대한 대학 캠퍼스 같았다. 지난달 26일 기흥단지 사무동 5층 VIP실에 들어섰다. 호암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말년까지 과감한 투자를 독려했다. 회사 관계자는 “대표적인 것이 제3라인(1MD램) 증설”이라고 말했다.
호암이 “좋은 기회가 오고 있다”며 3라인 건설을 처음 지시한 것은 1986년 중반이다. 그러나 이 말을 주의 깊게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적적자가 1300억원이 넘은 상황에서 다시 2800억원이 들어가는 신규 투자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그러던 87년 8월 6일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기흥 사업장으로 “내일 아침 회장께서 3라인 착공식에 참석한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비상이 걸렸다. 하룻밤 만에 행사 단상이 마련되고 공장 모형이 제작됐다. 3라인 착공식이 호암이 참석한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됐다.
공격 투자는 삼성이 반도체 명가에 오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3라인이 준공된 것은 88년 10월. 이 무렵 PC 붐에 힘입어 D램 경기가 살아났다. 그해 삼성반도체는 3200억원의 흑자를 냈다.
흔히 호암의 반도체 투자는 ‘무모한 다걸기(올인)’로 불렸다. 83년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자 국내외 연구소들은 “삼성이 하기에 버거운 사업”이라며 성공 가능성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호암은 “돈은 내가 해결한다”며 투자를 밀어붙였다. 그는 반도체를 ‘시간 산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반도체에서 인건비·재료비 비중은 10% 미만으로 낮다. 대신 수천억~조 단위의 설비투자가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타이밍이다. 호암이 “투자가 늦으면 영원히 후발 주자”라며 공장 설립을 주문한 것도 이런 이유다.
기흥단지에는 ‘한나절에 4㎞ 도로 포장을 끝냈다’거나 ‘추운 겨울에 선풍기 바람으로 콘크리트를 양생했다’는 등 속도전과 관련된 일화가 숱하게 전해온다. 성평건 당시 VLSI사업본부장은 “하루 24시간 공사를 강행해 잡초만 무성하던 야산이 6개월 만에 반도체 공장으로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83년부터 ‘D램 외길’을 걷고 있는 조수인 메모리담당 사장은 “전자산업의 미래를 봤던 혜안도 놀랍지만, 호암은 실현하는 능력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호암의 유지를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를 삼성의 대표상품으로 키웠다. 그는 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오늘날 삼성 반도체의 자양분이 되도록 했다. 글로벌 업체와 치열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는 지난해 2조원대 영업이익을 냈다.
기흥=이상재 기자
기흥 87년 종합기술원 설립 마지막 열정 타계 직전까지 미래를 위한 투자 계속
④ 영락없는 호랑이 모습이었다. 위에서 봐도, 옆에서 봐도 그랬다. 지난달 25일 찾아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농서동 산14-1번지의 삼성종합기술원(종기원)은 산을 등진 채 네 발로 땅을 딛고 선 호랑이를 연상케 했다. 종기원은 첨단·원천 기술 개발을 맡은 삼성그룹의 중앙연구소다. 종기원 관계자는 “이런 형태의 설계는 호암의 아이디어였다”고 설명했다.
호암은 생애 후반 첨단기술 확보에 열정을 쏟았다. 기술을 개발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비서실에 따로 ‘기술팀’을 만들었다. 연구개발 진행 실적을 얼마나 자주 물었던지 기술팀 직원들은 수치를 외우고 다녀야 했다. 호암은 사장단에게 “아무리 경영이 어려워도 연구개발비는 줄이지 마라”고 지시했다. 경영 사정을 이유로 연구개발비를 줄인 이들은 호암에게 혼이 났다(당시 비서실에 근무했던 길영준 종기원 전무의 회고).
종기원은 호암의 그같은 집념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사업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종기원 설립을 택했다. 그가 호랑이 모습으로 종기원을 지은 것은 첨단기술로 세상에 포효하는 호랑이가 되길 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종기원은 1986년 6월 착공됐다. 그가 타계하기 1년5개월 전이었다. 그는 기공식에서 “영원한 기술혁신과 첨단기술 개발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야말로 자원빈국인 우리나라가 살 수 있는 길”이라며 “종합기술원은 삼성의 미래를 주도할 최첨단 기술의 산실”이라고 말했다.
호암은 자신에게 남겨진 에너지와 가용 재원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는 수시로 종기원 건설 현장을 찾았다. 건물 기자재와 연구 설비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폈다. 종기원에는 대규모 자금이 투자됐다. 초기 투자비용만 1250억원이었다. 반도체 사업 적자로 그룹 전체가 비상이 걸린 시기였다.
종기원은 87년 10월 개원했다. 호암은 건강 악화로 참석하지 못했고, 한 달 뒤 영면했다. 호암이 사력을 다해 심었던 씨앗은 활짝 피어났다. 4G이동통신 기술, 컬러 신호처리 기술 등 종기원이 개발한 종자(seed)기술은 계열사로 뿌려져 ‘기술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 박사 550명이 몸담고 있는 종기원은 삼성 연구인력의 산실로 성장했다. 매년 종기원 연구인력의 10% 정도가 계열사의 현장으로 ‘분양’된다. 신기술 개발자가 그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규사업부 일을 맡는 식이다.
호암은 평생 기술에 목말라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일으킬 때도, 전자산업에 뛰어들 때도 늘 기술이 관건이었다. 그는 외국인 기술자를 초빙하고, 기술연수생을 파견하고, 기술제휴를 해서 기술을 배웠다. 그가 노년에 즐겨 쓴 휘호는 ‘무한탐구(無限探究)’였다. 종기원 2층 벽면엔 호암이 직접 쓴 네 글자 ‘무한탐구’가 23년째 한결같이 걸려 있다. 마치 호암이 줄곧 종기원의 첨단기술 개발을 독려하고 있는 것처럼.
기흥=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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